북-미 회담에 다녀와서
10일 김정은을 기다리며 길에서 9시간을 보냈다. 싱가포르 시민들도 김정은을 보기 위해 나왔다. 맨 왼쪽이 사진 전송하는 필자.
김재명 사진부 기자
‘내가 톰 크루즈도 아니고….’ 싱가포르행 비행기에 오르기 전 데스크의 주문을 듣고 이런 생각이 들었다. 세계 외교무대에 처음 나오는 은둔의 지도자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가장 먼저 앵글에 담으라니,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세기의 회담을 취재하는 것도 부담스러운데, 그게 가능할까? 안 되면 김정은의 ‘뜀박질 경호원들’을 헤치고 들어가 사진 찍는 결기를 보여줘야 하나?
비행기에서 내리자 싱가포르는 습식 사우나였다. 하루 종일 25도 이상에다 습도가 높아 한여름 열대야 같았다. 그런데 열대야 기후가 24시간 지속된다는 것. ‘으악, 난 더위가 제일 싫은데….’
도착 다음 날 올 것이 왔다. 김정은이 10일 오후 도착이란다. 예상보다 빨랐다. 바로 김정은 숙소로 알려진 세인트레지스 호텔로 갔다. 하지만 철옹성 그 자체. 호텔 주변에 설치된 2m 높이의 철망과 콘크리트 차단벽, 폐쇄회로(CC)TV는 “어딜 접근하려고”라고 윽박지르고 있었다. 하는 수 없이 호텔 진입로에 진을 쳤다. 김정은의 입국 일정이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으니 하염없는 기다림이 시작됐다. “아스팔트는 내 친구.”
10일 저녁 9시간만에 포착한 김정은의 모습.
그때 누군가 “한국분이시죠? 더운데 이거라도 드세요”라며 얼음팩과 얼음을 건넸다. 주변 기자들은 흙장난을 한 유치원생의 그것 같은 검은 손으로 얼음을 입에 넣었다. 손맛 때문이었을까, 얼음은 ‘꿀맛’이었다.
내가 찍은 사진이 신문에 실리지는 못했다. 사진은 ‘김재명 기자가 찍은 김정은 사진’으로 회사에 보고됐으나 편집회의에서는 북-미 정상회담의 두 주인공인 김정은과 트럼프의 공항 도착 사진을 비슷한 내용으로 짝을 맞춰 함께 싣기로 했다.
사실 취재 현장에 몰두하다 보면 정작 전체 상황을 모를 때가 많다. 김정은과 그렇게 숨바꼭질을 했는데, 그는 정작 11일 밤 유유히 시내 관광에 나섰다. 로이터통신은 그가 마리나베이샌즈 인근 야간투어에 나서 손을 흔들며 웃는 사진을 올렸다. 이제 김정은 사진은 흔한 것이 됐다. 잠시 허탈한 감정이 들기도 했지만 이것도 사진기자의 숙명인 것을 어쩌랴.
정상회담 당일 오후, 백악관 기자실에 낸 취재신청서가 통과돼 카펠라 호텔에 들어갈 기회를 얻었다. 카메라와 장비는 탐지견의 후각검사를 통과해야 했고, 내 몸은 X선 검색대를 지났다. 취재진 수백 명이 좋은 자리를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약속된 시간에 맞춰 트럼프 대통령이 회견장에 들어섰다. 두 시간 가까운 회견 동안 나도 모르게 손에 물집이 잡힐 정도로 계속 찍었다. ‘언제 또 이런 역사적인 현장에 다시 오겠는가.’
북-미 양국의 기 싸움 속에 취소와 재개의 롤러코스터를 탔던 회담은 마무리됐다.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는 기분이 홀가분했다. 나의 싱가포르 미션은 끝났다. 물론 새로운 미션이 기다리겠지만….
김재명 사진부 기자 bas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