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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룡의 중국 살롱(說龍)]한반도 비핵화에 중국이 항일 공동투쟁 강조 이유는

입력 | 2018-06-18 08:17:00


12일 세미나에 참석한 이강국 주시안 총영사와 시베이대 관계자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싱가포르에서 첫 북미 정상회담을 가진 12일 중국 산시(陝西) 성 시안(西安)의 시베이(西北)대에서는 ‘한국-중국 독립운동 협력 역사교류 세미나’가 열렸다. 시베이대와 주시안 한국총영사관 공동 주최로 열린 이날 세미나는 항일 운동 시기 시안에서 한중이 어떻게 손을 잡고 항일 독립 운동을 벌였는지 양국에서 2명씩 4명의 전문가가 주제 발표를 했다.

독립 운동 과정에서 시안이 중요한 장소 중의 한 곳이라는 점은 이미 알려졌고 많은 연구가 진행됐다. 2차 대전 후반기인 1940년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한국광복군이 2년간 시안에 옮겨와 있었다는 점을 알려졌지만 미국 전략첩보부대(OSS)와 공동으로 추진한 한반도 진공 계획 ‘독수리 작전’을 준비했던 훈련 장소는 올해 처음 확인됐다.(동아일보 2월 28일 단독 보도)

시베이대 실크로드연구원 리강 교수


이날 세미나에서 눈길을 끈 것은 중국 학자들이 공산당과 독립군과의 관계를 강조한 점이다. 시베이대 실크로드연구원 리강(李剛) 교수는 “오늘 한반도와 관련해 지구촌에서 중요한 회의가 두 개가 열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모두 아시다시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북한과 미국의 정상회담입니다. 또 하나는 무얼까요. 바로 여기서 열리고 있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 교류 세미나입니다”라고 운을 뗐다.

이날 소규모 세미나를 북미 정상회담과 나란히 비교한 것은 분명 과장된 표현이지만 ‘사드(THAAD·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앙금’으로 소원해진 한-중 관계를 개선하려는 중국 내부의 분위기를 보여주는 것이어서 의미가 적지 않았다.

김 위원장이 비핵화를 통해 정상 국가로 나아가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김 위원장이나 북한에 대한 대우가 달라졌다. 리 교수의 발언은 중국의 한국에 대한 태도도 달라지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강국 주시안 총영사는 “사드 갈등이 한창 일 때 중국측이 한중 일반 학술대회도 갑자기 취소하던 때와는 천지차이”라고 말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 행보에 나선 뒤 북-중, 북-미, 남-북 관계가 요동치고 있는 가운데 한-중 관계에도 훈풍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더욱이 이날 세미나는 시안에서 한국과 중국이 어떻게 손을 잡고 항일 독립 운동을 벌였는지가 주제였지만 광복군과 공산당의 협력 관계를 강조한 것도 눈길을 끌었다. 중국 내 임시 정부가 상하이(上海)에서 창사(長沙) 항저우(杭州) 충칭(重慶) 등으로 옮겨 다닐 때 주로 장제스(蔣介石)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았으나 마오쩌둥(毛澤東) 휘하의 공산당과도 적지 않은 인연이 있었다는 점도 강조됐다.

산시사범대 바이건싱 교수


바이건싱(拜根興) 산시사범대 역사문화학원 교수는 “1940년 9월 17일 충칭에서 광복군이 창설될 때 공산당 지도자인 저우언라이(周恩來)와 창당 멤버인 둥비우(董必武) 등도 참가해 서명했다”며 “시안 인근 공산당 성지 옌안(延安)과 독립군 성지 시안은 산시 성의 한 곳에 있었다”고 말했다. 바이 교수는 “이범석 장군을 모신 중국인 근무병 류(劉)모 노인을 면담한 내용이 2005년 8월 ‘시안만보’에 실렸고, 2014년 6월 ‘화상(華商)보’에는 항전 시기 시안은 광복 활동에 참여하려는 한국 청년들의 성지였다는 내용이 대서특필됐다”고 말했다.

시베이대 리웨이(李偉) 교수는 “김구 주석이 이끄는 임정 등 독립운동 지원은 주로 국민당이 한 것은 맞지만 항일 투쟁이라는 목표에서는 공산당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중국 공산당은 ‘6·25 전쟁에 참전해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아무리 한일 관계가 좋아져도 ‘일제시대와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주범’이라는 역사 적 각인을 지울 수는 없는 것과 같다.

싱가포르 회담으로 6·25 때 전쟁 당사자인 북한과 미국의 양국 정상이 전쟁 후 처음 만나 지구촌에 남아있는 마지막 냉전 구조를 해체하려 하고 있다. 이런 즈음에 중국이 6·25 전쟁 전에는 공산당이 한민족과 ‘공동 항일의 역사’가 있다며 우의를 강조하려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한반도 비핵화 무드’가 주는 또 다른 긍정적 효과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날 지방에서 열린 세미나 규모는 작아도 의미는 작지 않다는 점을 새삼 느끼게 했다.

단국대 사학과 한시준 교수


단국대 사학과 한시준 교수(동양학연구원장)는 중국 학자들이 언급한 ‘시안과 한국독립운동’에 대한 상세한 발표에서 “시안에는 임시정부가 군사특사단을 파견해 한인 청년 등을 모집했고, 한국청년전지공작대라는 군사조직이 시안에서 활동했다”며 “행사가 열린 시베이대에도 한국 청년(군사)훈련반이 설치돼 3기까지 배출됐다”고 소개했다.

한국광복군 훈련병이 강의를 들었던 예배당. ‘붉은 별’은 뒤에 사회주의 신중국 때 붙여진 것이다


다만 한 교수는 “임정 청사가 옮겨 다닌 곳을 다니면 피난살이 얘기만 듣지만 시안은 광복군이 한반도에 진입하기 위해 준비하며 희망을 품었던 생명력이 있는 곳”이라고 말했다. 한 교수는 “청산리 봉오동 전투 현장은 산 계곡 뿐인데 반해 시안은 중국에서 유일하게 항일 무장투쟁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라고 시안이 가진 의미를 강조했다. 광복군이 국내에 진입하기 전 일본이 항복했으며 시안에서 일제의 항복 소식을 들은 김구 주석은 기뻐하기보다 국내 진공으로 무장 투쟁 역량을 보여주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이성환 주시안 부총영사는 “시안 시내의 광복군 사령부가 있었던 ‘얼푸제(二府街) 4호’는 현재 일반 상가가 빼곡히 들어서 아무런 흔적도 찾을 수 없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서울시립대 사학과 염인호 교수



서울시립대 사학과 염인호 교수는 현지에서 발간된 ‘지우왕(救亡)일보’, ‘제팡(解放)일보’ 등의 보도를 중심으로 ‘조선의용군의 항일 투쟁과 한중 연대’를 소개했다.

지우왕일보 1947년 9월 8일자는 “조선이 병탄되지 않았다면 동북이 병탄되지 않았을 것이고 동북이 병탄되지 않았다면 적들이 감히 중국 전국을 침략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라고 한중 양국이 일본 제국주의 앞에서 공동 운명이었음을 강조했다. 이 신문은 “조선 민족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며 1919년의 3·1 만세 운동을 소개했다.

제팡일보 1942년 9월 20일자는 홍군의 주더(朱德)가 항일 투쟁에서 희생된 한인들에 대해 “숭고한 국제주의 정신을 발휘해 중국의 민족해방 전쟁을 지원하다 희생됐다”고 전했다. 조선의용대의 투쟁이 중국의 해방전쟁과 같은 항일 투쟁을 목표로 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강국 주시안 총영사


이강국 주시안 총영사는 “시안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빈번한 교류가 이어진 곳이자 1940년대에는 다양한 항일 활동이 전개된 곳”이라며 “2014년 중국 정부의 협조로 광복군 주력부대인 제 2지대가 주둔했던 시안 창안(長安) 구 두취(杜曲) 진에 표지석 기념공원도 만들어졌다”고 소개했다. 이 총영사는 “다만 충칭 사령부를 복원하기로 한 가운데 시안 광복군 총사령부가 있던 곳에도 옛터를 기념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