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서울]<7> 서울 마장축산시장 ‘32년 터줏대감’ 김성찬씨
서울 마장축산물시장에서 30년간 돼지 족발을 손질해 파는 김성찬 씨(왼쪽)와 그의 가게를 이을 사위 김기태 씨가 시장 한복판에서 ‘파이팅’을 외쳤다. 김단비 기자 kubee08@donga.com
자리를 뜨는 그에게 “방송 타는 거냐”며 주변 상인들이 부르자 “손님 안 보이는 곳에 작업 대야를 두라니까…”라며 애정 어린 참견으로 받아넘긴다. 소가 신기해 온종일 우시장 주변을 뛰놀던 소년은 머리 희끗한 마장동 터줏대감이 됐다.
1986년 봄 20대 중반의 그는 족발 전문점 ‘광장축산’을 열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 모 호텔에서 보안 경비일을 하며 미래를 고민할 때였다. ‘고졸인데 승진은 할 수 있을까. 적은 봉급에 말단 일만 할 텐데….’
몸이 좋지 않아 가게를 접었던 ‘마장동 1세대’ 아버지는 반대했다. 같은 일을 하는 아들 가게도 와보지 않았다.
김 씨 아버지는 경북 문경에서 1960년 상경해 마장동에 정착했다. 이듬해 종로구 숭인동 우시장이 마장동으로 옮겨왔다. 도축장이 생기자 거기서 싼값에 나오는 소 내장과 돼지 부산물을 파는 곳이 생겨났다. 그의 아버지도 이 대열에 끼었다. 마장축산물시장의 시초다.
“다이(‘허리 높이의 좌판’의 일본말)에 비닐 깔고 그 위에서 작업하셨죠. 아버지는 최대한 위생적으로 씻고 저울조작 하지 않고 파셨어요. 아버지가 납품한 식당에서 족발 먹는 사람들을 보면 어찌나 뿌듯하던지….”
1960, 70년대는 마장동 전성기였다. 저렴하고 신선한 고기를 사려는 사람들은 마장동을 떠올렸다. 곱창, 사골 구입에도 제격이었다.
개업한 지 2, 3년이 지나 거래처를 아버지보다 더 많이 뚫은 직후였다. 어느 날 아들 가게를 찾은 아버지는 한번 쭉 둘러보고 갔다. 김 씨는 아버지가 인정했다고 생각했다.
수도권 축산물 유통의 70%를 담당하던 마장동은 1980년대 후반 침체기를 맞았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1988년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당국은 위생을 강화했다. 노후한 배수관에, 악취와 오폐수로 단속에 걸리는 집이 많았다. 1988년 재개발로 아파트와 초등학교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도축장은 문을 닫았다. 변모해야 할 때였다.
2001년 상인들은 3억 원을 걷어 지붕에 차양을 치고 쇼핑카트를 곳곳에 뒀다. 위기도 있었다. 구제역이 터진 2010년에는 도축량이 줄어 주문 물량을 대지 못했다. 거래처가 하나둘 끊겼다. 문 닫는 점포도 속출했다. 김 씨는 “축산농가는 산지가격을 올렸지만 식당에는 이전 가격으로 팔았다. 적자를 감수했다”고 말했다. 옛 명성에 비할 바 아니지만 11만6150m² 터에 점포 약 2000개가 있는 마장동은 여전히 전국 최대 축산물시장이다.
30년간 찬바람 맞으며 일한 몸 이곳저곳에서 신호를 보낸다. 그래도 사위가 가게를 잇기로 해 걱정은 덜었다. 김 씨는 “족발은 서민의 힘을 북돋아 주는 음식이다. 사위가 그들의 헛헛한 속을 채워줄 것이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