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李健)의 ‘제주풍토기(濟州風土記)’
잠수를 하면서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포작(鮑作)이라 했다. 이원진(李元鎭)은 ‘탐라지’에 포작에 종사하는 남성은 적었고 여성은 많았다고 기록해 놓았다. 따라서 당초에 잠업(潛業)에 종사하는 남성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숙종실록’에 따르면 바닷가에서 배를 소유하고 있으면서 고기잡이에 직접 종사하는 격군(格軍)의 아내를 잠녀라 칭하고, 격군은 아내에 비해 2배 정도의 포작을 관아에 바쳤다고 한다. 특히 ‘남사일록(南槎日錄)’ 1680년 기록에 제주에는 남자의 묘가 매우 적으며 여성은 남성에 비해 3배 정도가 많다는 기록과 함께 딸을 낳으면 부모에게 효도할 사람을 낳았다고 하고, 아들을 낳으면 고래와 자라의 먹이라고 칭한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관아의 무리한 요구에 못 이긴 격군과 잠녀들이 도망갔다는 기록이 많은 것을 보면, 당초 남녀 모두 잠업에 종사하였으나 죽음과 도망으로 인해 남아 있는 여성들이 이 일을 모두 떠맡은 것으로 보인다.
어촌에 사는 사람들인 경우 남편은 포작을 비롯하여 선원 노릇까지 해야 했고, 아내 역시 잠녀 생활을 하여 1년 내내 진상할 전복과 미역 등을 마련해 관에 바쳐야 했다. 1702년 조정에 올려진 장계(狀啓)에는 이러한 상황이 목동의 어려움에 비해 10배가 넘는다고 하였으니 노동 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포작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감소하였고, 1695년까지 전복잡이 잠녀는 90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으며, 미역을 캐는 잠녀는 약 800명이 있었다. 전복류를 채취하는 일이 너무 힘들어 도망가 버리고 나이가 많아 이 일에 종사할 수 없게 되어 전복잡이 잠녀의 수가 점점 감소하자 관리들은 조정에 진상할 상품을 걱정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그 대안으로 미역잠녀들에게 전복 1, 2개를 할당해 전복 채취의 기술을 익히게 한 다음 전복잡이 잠녀의 수를 유지하였다.
제주의 어촌 여성들은 누에치기와 솜 타는 일에 종사하지 않았다. 그들은 양태를 들고 망사리를 맺어 미역을 따고 전복 캐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열 살이 되면 이미 잠수 기술을 익혔는데, 이 순간부터 바닷속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기술이 족쇄가 되어 삶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죽어서야 그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지금은 해녀(잠녀)들이 전복, 해삼, 소라, 문어 등을 따면서 자기 일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마을 어장은 공유자산으로 적지 않은 경제적 가치를 안겨주고 있지만, 이들의 역사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강문종 제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