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적같은 일을 해냈다.”(국민회의 김대중 총재)
“헌정사 최초로 야권 단일후보가 탄생했고, 공동정부의 출범이 기다리고 있다.”(자민련 김종필 총재)
15대 대통령선거를 40여일 앞둔 1997년 11월 3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당시 국민회의 김대중(DJ) 총재와 자민련 김종필(JP) 총재가 마주 앉았다. 두 사람은 ‘야권후보단일화 합의문’에 각각 서명한 뒤 이 같이 말했다. ‘DJP 연대’가 성사된 순간이자, 헌정 사상 최초로 투표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의 계기가 마련된 순간이었다.
● 집권 위해 손 잡은 DJ와 JP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함께 5·16 쿠데타를 주도했던 JP와, 박 전 대통령에 의해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DJ가 손잡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양측은 1996년 4·11 총선 이후 연대를 위한 물밑 작업의 시동을 걸었다.
이날 서명식 직후 당시 자민련 이양희 의원은 “여당의 인위적인 ‘여대야소 만들기’에 맞서 야권공조를 시작한 이래 1년 6개월 동안 모두 18차례의 회의를 거쳐 후보단일화를 이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공식 회의가 아닌 양측의 비공개 접촉은 이보다 훨씬 많았다. 호남의 맹주인 DJ와 충청의 맹주인 JP의 위상도 위상이었지만, 대통령제를 희망하는 DJ 측과 내각제에 관심이 있는 JP 측의 서로 다른 이해관계도 지난한 협상의 이유였다.
결국 JP가 강하게 주장했던 ‘내각제 개헌’을 DJ가 “당선 후 추진하겠다”고 약속하면서 양측은 공식적으로 손을 맞잡았다. 두 사람은 ‘1999년 12월까지 내각제 개헌을 성사시킨다’며 개헌의 구체적인 시점까지 못 박았다.
하지만 ‘집권 후 국무총리는 자민련에서, 각료 배분은 50대 50, 내각제 개헌 후 대통령과 수상의 우선 선택권은 자민련’ 등 양측의 합의 내용은 “선거를 치르기도 전에 전리품부터 나눈다”는 거센 비판을 불렀다.
● 대선 승리 쟁취했지만 결과는 파욱
1997년 15대 대선에서 DJ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제치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불과 39만여 표 차의 박빙 승부였다. DJ는 영남 지역에서 이 후보에게 뒤졌지만 대전·충남·충북 등 충청권에서는 이 후보를 앞섰다. 공동 선거대책회의 의장을 맡은 JP의 공이 컸다는 사실을 DJ 측도 부인하지 않았다. JP는 “칠십평생 무대 위에서 활동해 왔으나 이번에는 DJ에게 주역을 맡기고 스스로 조연을 맡기로 했다”(1997년 12월 2일 충남 아산 유세)며 선거운동 기간 내내 DJ 지지를 호소했다. DJP 연대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였다.
이듬해 국민의 정부 첫 조각에서도 연대는 굳건했다. JP는 초대 국무총리를 맡았고, 17개 부처 장관 중 국민회의가 7개, 자민련이 6개를 가져갔다(4곳은 양당 공동추천). 하지만 양측의 공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DJP 연대가 출범할 때 약속했던 ‘내각제’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두 사람이 내각제 개헌의 시기로 못 박은 1999년 벽두부터 내각제는 정권의 최대 화두가 됐다. DJ 측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내각제 논의를 하면 혼란이 일어난다”(김중권 청와대 비서실장)며 내각제 개헌 연기를 주장했다. 양측은 내각제를 두고 그 해 내내 힘겨루기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총리는 JP에서 TJ로 바뀌었다.
의회 주도권을 노린 DJ는 이 총재를 총리로 지명하며 다시 DJP 연대의 복원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원내교섭단체(20석) 요건을 충족을 위해 민주당이 송석찬 배기선 송영진 의원을 자민련에 입당시키는 초유의 ‘의원 꿔 주기’가 이뤄졌다.
하지만 다시 복원된 공조는 오래가지 못했다. 2001년 9월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놓고 DJ와 JP는 재차 충돌했다. 자민련이 해임건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DJP 연대는 최종적으로 끝이 났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