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수 씨의 옛 주민등록표. 육군 보병 하사로 근무한 기록과 군번 등이 남아 있다. 김명수 씨 제공
25일 강원 강릉에 사는 김명수 씨(87)가 TV를 보다 딸 복순 씨(45)에게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TV에는 ‘6·25전쟁 68년’이란 자막이 깔리며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배하는 공직자들 모습이 스쳐갔다. 매년 6월 김 씨 집에서 반복되는 풍경이다. 김 씨는 6·25전쟁 참전용사이지만 국가유공자 심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1950년 전쟁이 터졌을 때 김 씨는 19세였다. 그해 7월경 경북 경주 친척집 마을 어귀를 거닐다 거리에서 징집됐다. 군인들은 다급하게 청년들을 모아 군용트럭에 태웠다. 트럭은 대구 한 중학교에 김 씨와 또래들을 내려줬다. 군복과 총이 지급됐고 그렇게 군인이 됐다.
김 씨가 국가유공자 심사조차 못 받은 건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탓이 컸다. 부끄러운 마음에 관공서 가기를 꺼렸다. 참전용사라는 걸 입증하면 어떤 보상을 받는지도 잘 몰랐다. 60년 넘게 참전 기억을 혼자 간직했다.
지난해 설날 김 씨 사연을 처음 듣게 된 조카가 뒤늦게 국가보훈처를 찾았다.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려면 병적증명서가 필요했다. 조카는 육군본부에 ‘김명수’의 병적(兵籍) 기록 확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 씨 가족과 친척은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다 딸 복순 씨가 강릉 호남동사무소에서 김 씨의 군번과 특기, 계급이 수기(手記)로 적힌 주민등록표를 발견했다. 주민등록제가 실시된 1962년 무렵에 기록된 것으로 보였다. ‘(제대) 56년, 육군 보병, 하사, 군번 111793.’ 김 씨는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육군본부에선 김 씨 군번에 해당하는 기록 역시 없다고 답변했다. 사실상 참전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몸에 탄흔이 남은 김 씨는 그저 TV에서 6·25전쟁을 다룬 뉴스를 볼 때마다 넋두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참전용사들이 대통령을 만났다는 뉴스에 유독 부러워했다. 보다 못한 가족이 국방부에 진정을 넣었지만 1년째 반응이 없다.
김 씨는 요즘 기억이 흐릿하다. 요통약을 먹은 지 30분도 안 돼 복순 씨에게 다시 약을 달라고 하는 날이 많다. 복순 씨는 아버지가 모든 기억을 잃기 전에 참전용사로 인정받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