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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窓]“6·25 총상 생생한데 유공자 안된다니…” 노병의 눈물

입력 | 2018-06-26 03:00:00


김명수 씨의 옛 주민등록표. 육군 보병 하사로 근무한 기록과 군번 등이 남아 있다. 김명수 씨 제공

“내도 전쟁터에 있었는디… 총알 맞아가 죽다 살았지.”

25일 강원 강릉에 사는 김명수 씨(87)가 TV를 보다 딸 복순 씨(45)에게 혼잣말처럼 얘기했다. TV에는 ‘6·25전쟁 68년’이란 자막이 깔리며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참배하는 공직자들 모습이 스쳐갔다. 매년 6월 김 씨 집에서 반복되는 풍경이다. 김 씨는 6·25전쟁 참전용사이지만 국가유공자 심사조차 받지 못하고 있다.

1950년 전쟁이 터졌을 때 김 씨는 19세였다. 그해 7월경 경북 경주 친척집 마을 어귀를 거닐다 거리에서 징집됐다. 군인들은 다급하게 청년들을 모아 군용트럭에 태웠다. 트럭은 대구 한 중학교에 김 씨와 또래들을 내려줬다. 군복과 총이 지급됐고 그렇게 군인이 됐다.

8월 북한군은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다. 김 씨는 송요찬 당시 수도사단장 산하 부대 보병으로 임했다. 국군 최후 방어선을 지킨 경주 안강전투, 지리산 빨치산 토벌 작전과 금화지구 전투에도 참전했다. 숱한 동료가 스러져 갔다. 김 씨도 엉덩이에 총알, 머리에 포탄 파편을 맞았다. 미 육군 18의무부대에서 수술을 받았지만 정전 후 3년 만에 의병 전역했다.

김 씨가 국가유공자 심사조차 못 받은 건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르는 탓이 컸다. 부끄러운 마음에 관공서 가기를 꺼렸다. 참전용사라는 걸 입증하면 어떤 보상을 받는지도 잘 몰랐다. 60년 넘게 참전 기억을 혼자 간직했다.

지난해 설날 김 씨 사연을 처음 듣게 된 조카가 뒤늦게 국가보훈처를 찾았다.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려면 병적증명서가 필요했다. 조카는 육군본부에 ‘김명수’의 병적(兵籍) 기록 확인을 요청했다. 하지만 기록이 없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김 씨 가족과 친척은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다 딸 복순 씨가 강릉 호남동사무소에서 김 씨의 군번과 특기, 계급이 수기(手記)로 적힌 주민등록표를 발견했다. 주민등록제가 실시된 1962년 무렵에 기록된 것으로 보였다. ‘(제대) 56년, 육군 보병, 하사, 군번 111793.’ 김 씨는 ‘이제 됐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육군본부에선 김 씨 군번에 해당하는 기록 역시 없다고 답변했다. 사실상 참전 사실을 스스로 입증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몸에 탄흔이 남은 김 씨는 그저 TV에서 6·25전쟁을 다룬 뉴스를 볼 때마다 넋두리를 늘어놓을 뿐이었다. 참전용사들이 대통령을 만났다는 뉴스에 유독 부러워했다. 보다 못한 가족이 국방부에 진정을 넣었지만 1년째 반응이 없다.

육군본부 관계자는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6·25전쟁 당시 이름을 잘못 쓰거나 대리 입영한 경우도 많아 일일이 인정해주는 데 어려움이 있다”며 “같이 참전했던 동료를 데려와 참전 사실을 입증하면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김 씨는 요즘 기억이 흐릿하다. 요통약을 먹은 지 30분도 안 돼 복순 씨에게 다시 약을 달라고 하는 날이 많다. 복순 씨는 아버지가 모든 기억을 잃기 전에 참전용사로 인정받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다.

김자현 기자 zion3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