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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성하 기자의 서울과 평양 사이]김정은, 아버지의 마지막 꿈을 기억하라

입력 | 2018-06-27 03:00:00


2011년 8월 생애 마지막 해외 방문길에 오른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러시아 아무르주를 시찰한 뒤 난간이 있는 경사판을 걸어 전용열차로 힘겹게 다시 오르고 있다. 동아일보DB

주성하 기자

2011년 8월 김정일은 뇌중풍(뇌졸중) 후유증으로 절뚝거리며 힘겹게 생애 마지막 해외 방문에 나섰다. 나흘 동안 열차로 3900km를 이동해 간 곳은 러시아 아무르주.

이곳에서 그는 서울 면적(6만 ha)의 3배가 넘는 빈 땅 20만 ha를 임차해 농사를 짓겠다는 구상을 밝혔다. 그는 그해 10월에도 아무르 주지사를 평양에 불러 임차 계획을 구체화했다. 그러나 김정일이 두 달도 안 돼 사망하면서 그의 마지막 꿈은 물 건너가는 듯했다.

북한이 2013년 아무르주에 1000ha 규모의 작은 시범농장을 시작하고 이듬해까지 운영했다는 것까진 알려졌지만 이후 소식이 없다. 작황도 시원치 않았던 것 같고, 대북 제재로 대규모 인력 파견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은 북한의 식량 문제를 풀려고 농지 임차 계획을 세웠겠지만, 만약 이 구상이 지금 현실화됐다면 다른 시각에서 탁월한 선택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세계 두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이 무역전쟁을 치르면서 대두가 초미의 관심사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미국이 500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제품에 25%의 수입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하자, 중국이 내달 6일부터 미국산 대두에 25%의 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중국은 미국산 대두 3300만 t, 139억 달러어치를 수입했다. 문제는 미국산 대두에 관세를 부과하면 중국인의 밥상에서 빠지지 않는 돼지고기와 식용유 가격도 덩달아 오르게 된다.

중국은 미국산 대두를 대체할 수입처를 찾지 못했다. 동북 지역을 활용해 내수로 대체하려 해도 경작지가 많지 않고, 시간도 꽤 걸린다. 하지만 러시아 극동(원동)의 광활한 땅은 중국의 대두 공급처로 적합하다.

북한이 20만 ha에 콩을 심었다면 최대 40만∼50만 t을 생산했을 것이다. 러시아 극동의 1ha당 콩 생산량은 유기농 1t, 일반 콩은 최대 3t을 넘지 못한다.

극동에선 콩 보리 밀 귀리를 한 세트로 순환 재배를 한다. 이 작물들은 높이가 비슷해 한 콤바인으로 경작이 가능하다. 옥수수는 높이가 달라 콤바인을 새로 사야 한다. 극동에서 쓰는 농기계는 미국산이 많다. 한국 농기계는 작아서 광활한 극동의 농사엔 적합지 않다. 극동에 경작지가 늘면 미국 농기계도 대거 팔릴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자국 농가들에 직접적 피해가 될 러시아 극동 농지 개간을 반길 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생산량 100만 t 정도는 북한과 러시아만 결심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중국을 경계하는 러시아는 극동에 북한 외에 딱히 갖다 쓸 만한 노동력이 없다.

러시아산 곡물은 한국인과도 밀접히 연관될 수 있다. 2년 전 러시아는 유전자변형동식물(GMO) 금지법을 채택했다. 러시아산 곡물은 Non-GMO라는 의미다.

우리나라는 연간 1000만 t의 GMO 곡물을 수입한다. 인구 1인당 쌀 소비량이 65kg인데, GMO 소비량은 45kg 세계 최대 수준이다. 한국에선 GMO 대두 100만 t이 독성 물질인 헥산을 사용하는 유기용매 추출 방식으로 식용유 생산에 쓰인다.

GMO 유해성은 과학적 논쟁의 대표적 주제다. 한쪽에선 한국이 GMO를 수입하기 시작한 1990년대 중반 이후 자폐증 대장암 발병률 세계 1위, 유방암 치매 증가율 1위가 됐으며, 출산율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또 다른 쪽에선 GMO 부작용이 전혀 근거가 없다고 한다. 어느 쪽이 맞는지는 모른다. 다만 북한에서 살다 온 나는 왜 같은 민족인데 남쪽엔 자폐증과 치매 환자 등이 너무 많은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북한은 GMO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고, 콩기름도 전통적 압착 기법으로 생산한다.

수입 GMO 곡물을 러시아산 Non-GMO 곡물로 대체하면 최소한 손해 볼 일은 없다. 깨끗한 공기와 더불어 안전한 먹을거리 역시 한국인의 사활적인 관심사다. 이런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이번 러시아 방문 때 농업 교류를 좀 더 중요하게 다뤘어야 했다. 이미 극동 지역엔 한국 농업인들이 진출해 10만 ha 이상 경작하고 있다.

극동 농업은 노동력 때문에 북한의 참여가 필수적이다. 러시아는 김정은에게 9월 이전 자국을 방문해 달라고 요청했다. 만약 간다면 농업 교류를 먼저 추진하길 바란다. 이는 강대국들의 사활적 이해관계에 북한이 뛰어들 수 있는 카드이기도 하다. 김정은이 아버지의 마지막 꿈을 기억하기 바란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