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대학이 살린 도시, 현장을 가다
미국 피츠버그의 카네기멜런대(CMU)와 피츠버그대는 로봇과 생명과학 분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왔다. 두 대학의 인재와 연구력을 보고 글로벌 기업들도 몰려온다. CMU의 로봇연구소(왼쪽 사진)와 피츠버그대 맥고언재생의학연구소는 피츠버그가 몰락한 철강도시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로 꼽힌다. 피츠버그=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피츠버그대 제공
몰락한 철강도시 시절 피츠버그의 흔적은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었다. 과거 제철소를 비롯해 대형 공장들이 있던 지역의 주택가에는 오랜 기간 빈 상태로 방치된 집들이 눈에 띄었다. 피츠버그 주민들 사이에서 도시 미관을 해치고 범죄도 많이 발생하는 동네로 여겨진다. ‘피츠버거(피츠버그 출신을 의미) 디아스포라’란 말도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제철소에서 일했다는 50대의 한 택시운전사는 “초등학교 다닐 때 다른 도시로 이사 간 친구가 거의 절반을 넘었는데 이런 경우는 미국에서 드물다”며 “미국 어디를 가도 어렵지 않게 피츠버거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고 했다.
그런 피츠버그가 변신하고 있다. 블루칼라 인력을 대거 키워내던 기술학교 건물들도 흉물스러운 모습으로 방치돼 있다가 최근 창업과 연구 공간으로 거듭나고 있다.
○ 첨단연구의 중심지 카네기멜런대와 피츠버그대
5월 23일 피츠버그에 있는 카네기멜런대(CMU)의 게이츠힐먼관(컴퓨터과학대 건물) 지하와 1층은 여름방학이 막 시작됐는데도 학생과 교수들로 북적였다. 로봇 관련 연구시설이 밀집한 이곳은 로봇 연구로 명성이 높은 CMU의 경쟁력을 상징하는 곳이다.
CMU 컴퓨터과학대를 이끌고 있는 앤드루 무어 학장은 “최첨단 로봇 기술이 개발되고 있는 현장”이라며 “피츠버그가 실리콘밸리같이 세계적인 첨단기술의 중심지로 도약하려고 준비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공간”이라고 말했다.
CMU와 함께 이 지역의 또 다른 유명 대학인 피츠버그대에는 생명과학과 의학 관련 연구시설이 많다. 피츠버그 도심에는 이 대학의 부속병원 격인 피츠버그대의료원(UPMC) 시설이 밀집해 있다. UPMC는 미국에서 최초로 장기 이식 수술을 성공했을 만큼 의학 분야에서 명성이 높다.
실제로 최근 피츠버그대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구소 중 하나도 조직공학(Tissue Engineering) 연구를 진행하는 맥고언재생의학연구소(맥고언연구소)다. 조직공학은 생명과학·의학·공학의 융합 분야로 생체조직의 대용품을 만들어 이식하는 게 주목적이다. 맥고언연구소 윌리엄 와그너 소장은 “이 자리는 과거 피츠버그가 철강도시로 유명할 당시 제철소가 있던 곳”이라며 “지역경제의 변신을 제대로 보여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 “대학은 도시의 성장엔진”
피츠버그에서 두 대학이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는 이 지역에 기반을 둔 자선기관인 헨리힐먼재단이 지난해 브루킹스연구소에 지역발전 전략 컨설팅을 의뢰했을 때도 확인됐다. ‘글로벌 혁신 도시로 성장하는 피츠버그’란 최종 보고서의 내용을 가장 많이 참고하고 이행해야 할 기관으로 힐먼재단이 시 정부가 아닌 CMU와 피츠버그대를 선정한 것.
리베카 베글리 피츠버그대 부총장(경제협력부문)은 “‘시장과 시 정부는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두 대학은 피츠버그에 영원히 있을 것이다’라는 게 힐먼재단의 논리였다”며 “지역사회에서 두 대학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 로봇과 생명과학에 특화된 ‘실리콘밸리’를 꿈꾼다
CMU와 피츠버그대가 지역경제의 성장엔진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다는 건 창업 활동에서도 잘 드러난다.
현재 피츠버그 지역에서는 로봇과 인공지능(AI) 관련 기업이 70개 이상 활동하고 있다.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이곳에서 근무하는 인력의 상당수가 CMU 출신이라는 것. ‘동문 기업’이 많은 만큼 각각 다른 배경을 갖춘 인력이 많은 실리콘밸리, 보스턴, 뉴욕, 시애틀 등의 벤처업계보다 네트워킹이 활발하고 협력 수준도 높다는 평가가 많다.
행사 참여 기업 중 하나인 카르타의 케빈 다울링 최고경영자(CEO)는 “실리콘밸리 등 다른 지역에서 활동하던 CMU 출신의 엔지니어와 기업인 중 피츠버그로 돌아와 사업을 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며 “하루가 다르게 지역의 벤처생태계가 성장하는 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CMU는 올해 9월 또 하나의 새로운 도전에 나선다. 미국 대학 중 최초로 학부(컴퓨터과학대)에 AI 전공을 개설하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먼저 로봇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대학답게 AI 분야에서도 주도권을 잡는 게 목표다. 무어 학장은 “로봇은 물론이고 다른 미래 기술에서도 AI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할 것이기 때문에 전공 개설을 결정했다”고 말했다.
피츠버그대에서는 생명과학 분야의 창업 활동도 활발하다. 최근 연간 20개 정도의 스타트업이 탄생하고 있다. 이 중 70%가 생명과학 관련 스타트업이다. 이 대학의 창업 및 기술상업화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이노베이션연구소의 에번 파셔 수석디렉터는 “다소 적어 보이지만 정식으로 스핀오프(분사)까지 한 스타트업들만 집계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며 “최근 5년간 스핀오프한 스타트업 중 90%가 생존해 있을 만큼 경쟁력이 우수하다”고 말했다.
피츠버그대는 CMU처럼 컴퓨터과학 전공을 단과대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다. 대학 안팎에서는 피츠버그대가 로봇과 AI 분야의 역량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평가가 많다. 또 피츠버그대는 대학의 연구와 창업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버려졌던 공장 건물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피츠버그의 변화를 보고 최근 우버, 구글, 바이엘, 필립스 같은 글로벌 기업들도 연구개발(R&D) 시설을 늘리고 있다. 특히 우버는 무인자동차 주행 관련 기술을 피츠버그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한다. 미국 국방부로부터 연간 8000만 달러, 민간 부문에서 5년간 1억7300만 달러의 자금 지원을 받는 로봇 제조 전문 컨소시엄인 ARM도 지난해 피츠버그에 자리를 잡았다.
피츠버그=이세형 기자 turt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