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클리 리포트]대학이 살린 도시, 현장을 가다
한 로봇 전시 행사에서 덴마크남부대(SDU) 무인항공시스템(UAS)센터가 첨단 드론 장비를 선보이고 있다. 덴마크는 고령화, 생산성 하락, 복지 지출에 발목 잡힌 경제를 되살릴 돌파구로 ‘로봇산업’을 택했다. 인구 20만 명의 오덴세시는 25년 만에 세계적 로봇도시로 자리매김했다. 작은 사진은 SDU 공대 건물. UAS센터 트위터·SDU 홈페이지 캡처
지난달 15일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시에서 기차로 1시간 반을 달리자 오덴세시를 알리는 간판이 나왔다. 창밖으로 형광빛을 품은 황금 논밭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로봇도시’와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풍경에 어리둥절할 때쯤 네모반듯한 흰색 건물이 보였다. 오덴세 지역 대학인 덴마크남부대(SDU) 무인항공시스템(UAS)센터 건물이다.
UAS센터는 무인항공·로봇 관련 기업, 대학, 스타트업, 관련 종사자가 함께하는 일종의 클러스터다. 한창 공사 중인 이곳은 완공 후 7300m²(약 2200평) 터에 각종 실험 시설과 중장비가 들어서게 된다. 브래드 비치 UAS 센터장은 “대학 안에 있던 UAS센터 건물을 확장해 시설을 새로 짓고 있다”며 “기업인, 학생, 연구진이 어울리며 열정과 영감을 돋울 수 있도록 개방형으로 건물을 설계했다”고 했다.
○ ‘로봇도시’ 25년
‘어떻게 하면 시가 활기를 되찾을까.’ 시정부, 기업, 대학은 머리를 싸맸다. 격론 끝에 덴마크는 조선술이 발달해 로봇산업에 도전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고임금으로 인한 제조업 침체를 로봇개발로 타개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26년 전 머스크는 로봇을 다음 먹거리로 정했고 정부, 시정부와 합자해 SDU에 1200만 달러(약 134억 원)를 투자했다. ‘대학-기업-시정부’의 트라이앵글 협력이 시작됐다.
투자를 받은 SDU는 로봇분야 선도대학이 되기 위해 박차를 가했다. 관련 학과를 신설하고 전 세계에서 연구진과 교수진을 스카우트했다. 그 결과 SDU는 오덴세의 거의 모든 로봇기업의 지식센터로 기능하게 됐다.
헨리크 빈드슬레프 SDU 공대 학장은 “기업과 일하면 연구비가 생기고 더 많은 인력을 고용할 수 있다. 학교 재정도 자연히 안정된다”며 “산학협력은 기업과 대학 모두에 이익”이라고 했다. 또 “대학이 발 빠르게 최신 연구동향을 따라잡지 않으면 기업의 지식센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대학 투자→대학 성장→연구결과 기업에 기여’의 선순환 모델을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현재 오덴세는 세계적인 로봇도시로 꼽힌다. 2016년 로봇 밀집도(Robot Density) 기준으로 덴마크는 전 세계 6위. 자동차 제조국을 빼면 덴마크가 1, 2위쯤 되는 셈이다. 세계적인 로봇회사인 유로로봇 등 로봇 관련 기업 150여 곳이 오덴세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다. 병원, 철도, 학교, 아파트…. 오덴세 곳곳은 공사판이었다. 지역 기업·대학에서 일할 인력을 유치하기 위해 도시 기반시설을 닦는 것이다. 빈드슬레프 학장은 “2001년 첫 스핀아웃 기업을 배출한 뒤 15년간 로봇 관련 기업 150여 곳이 이곳에서 탄생했다”며 “시가 성장하면서 이곳에 정착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다시 도시가 활력을 되찾았다”고 했다.
○ “교수님은 CEO”
“사고로 팔을 쓰지 못하던 환자가 이 로봇으로 6개월간 훈련한 뒤 팔을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SDU 연구장인 앤더슨 쇠렌슨 씨가 이렇게 말하며 자신이 만든 재활훈련 로봇을 시연했다. 2012년 오덴세조선소가 문을 닫은 뒤에는 로봇 관련 스타트업 육성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SDU 곳곳에서 스타트업 직원들이 머리를 맞댄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교수, 석·박사 과정 학생, 학부생 등은 아이디어를 상용화해 창업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
신선한 아이디어가 있어도 첫 개발품을 만들어 시장에 선보이는 과정은 쉽지 않다. 시제품을 만들고 자금을 확보하고 유통망을 마련해야 한다. 연구 공간과 컨설팅 인력이 상주하는 코어텍스파크를 통하면 시장에 빠르게 진입할 수 있다. 이곳에서 만난 학부 2학년 예스퍼 씨는 “상주 전문가의 도움으로 3개월 만에 학생들을 위한 전자기기 키트를 만들었다”며 “곧 인터넷에서 판매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코어텍스파크를 만든 뒤 창업 관련 실적이 급증했다. 2년 전 16개에 불과하던 스타트업이 현재 150여 개에 이른다. 빈드슬레프 학장은 “벤처컵 대회를 했는데 5개 중 3개 분야에서 SDU가 우승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오덴세 지역에 기반을 둔 대부분 로봇회사가 SDU와 연구협력관계를 맺고 있다. SDU 연구진이나 교수가 만든 자회사도 적잖다.
UAS센터도 오덴세에 활력을 가져온 일등 공신으로 꼽힌다. 오덴세공항, 오덴세시, SDU의 합작품인 UAS센터는 3자가 ‘윈윈’하는 시스템이다. 대학은 최고의 연구 시설을, 시는 회사 유치를, 공항은 터 활용이라는 이익을 얻게 된다. 덴마크 정부 펀드가 공항 터를 사들인 뒤 로봇 관련 연구·교육·산업을 위한 공간을 만들었다. 지방정부는 기업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적극 협조한다. 최근 오덴세시는 오덴세 상공 800km²를 드론 우선 지역으로 지정했다. 이곳에서는 어떤 비행물체보다 드론이 우선해서 비행할 수 있다. SDU 측의 건의를 오덴세시가 검토한 뒤 정부에 전달해 해당 규정을 바꾼 것. 등록 드론과 비등록 드론을 구분하는 규제를 도입하는 등 필요한 행정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 거미줄 시스템과 수평적 문화
덴마크는 1990년대 이후 총체적 난국에 빠졌다. 인구 고령화로 노동생산성은 하락하고 복지지출로 재정이 고갈됐다. 정부, 민간기업, 연구기관은 국가 발전전략을 새로 짰다. 그 결과 생명공학·로봇·의료·제약 등에 집중하기로 했다. 대학은 정부 전략산업에 집중해 지역 성장을 이끌고, 시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해 연구개발에 유리한 환경을 만든다.
덴마크의 산학연 시스템은 물샐틈없이 촘촘하다. 자금, 인력, 아이디어를 묶어주고 실행하는 다양한 기관들이 덴마크 경제를 이끈다. 기업·연구기관·대학의 연구과제와 인력을 통합관리하고 협력하는 ‘메이드(MADE)’, 덴마크 대학·기업의 해외 진출을 돕는 ‘이노베이션센터’, 해외의 기술과 자본을 덴마크에 도입하는 비영리 독립기구 ‘코펜하겐코페서티’, 생명공학 클러스터인 ‘바이오피플’ 등 각 분야 클러스터 등이 대표적이다.
덴마크 특유의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문화도 빠른 국가 체질개선을 도왔다. 바이오피플의 페르 스핀들러 이사는 “덴마크에선 학생과 교수가 거리낌 없이 토론하고 교류한다. 이는 창업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라고 했다.
오덴세=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