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가끔 ‘멍 때리고 싶은 날’이 있다.
하지만 불행히도 대부분의 엄마들에겐 멍 때릴 자유조차 주어지지 않을 때가 많다. 다자녀 엄마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엄마를 찾는 아이들이 줄을 선다. “엄마, 물 주세요. 목말라요.” “모기 물렸어요. 약 발라주세요.”
며칠 전도 그런 날이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잠시 천장 바라볼 여유도 없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출근 전 큰 아이 먹을 ‘아침 도시락’을 싸고 나머지 두 아이의 밥을 차려야 했다.
뜬금없이 점심도 아닌 아침 도시락을 싼 이유는 첫째가 일어나자마자 곧장 병원에 가야했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인가 첫째 목에 빨간 것이 나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어제는 급기야 누런 농이 잡히고 뜨끈뜨끈 열이 나기 시작했다. 뭔가 아니다 싶었지만 평일이라 병원 갈 시간이 없었다. 남편이 쉬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아침 일찍 병원에 데려가 보기로 했다. 단순 소아과 질환이 아닐 수 있어서 종합병원에 가기로 했는데, 종합병원은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1시간 가량 기다리기 일쑤라 아침밥을 대기하는 중 먹을 수 있도록 도시락을 싼 것이다.
아침 보고를 마치면 한시름 놓나 싶지만 이날은 바로 쉴 틈 없이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첫째가 병원 진료를 마치고 나올 시간이었다. 의사가 다음주 평일 초음파 검사를 받으러 오라 했단다. 교수 일정상 몇몇 평일 오전밖에는 안된다나. 아 평일이라니…. 부랴부랴 친정엄마에게 SOS를 쳤다. 하필 검사가 가능한 날 엄마도 선약이 있으시단다. “괜찮아요, 다른 사람 찾아보거나 예약 변경하면 돼요.” 호기롭게 답했지만 사실 낙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같은 동네 사는 동생도 직장에 다니기에 평일 오전에 여유가 있을 턱이 없었다. 농의 상태가 좋지 않아 예약을 미루면 안 될 것 같았다. 일단 주말 중 아이 상태가 호전되길 기도하며 정 안되면 내가 오전 반차를 내기로 했다.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할 일이 이어졌다. 자잘한 보고와 팀 업무, 요청한 자료 확인, 인터뷰 확정 등. 30여 분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니 어느새 오전 11시였다. 오전이 훅 갔다. 점심약속 장소로 이동해야 했다.
예전에는 대중교통을 타면 멍 때리고 바깥을 쳐다보던 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요 근래는 그래본 기억이 없다. 이날도 버스를 타자마자 기다렸단 듯 아이들 알림장 앱(어플리케이션) 알림이 ‘띠링띠링’ 울었다. ‘어머니, 기저귀가 떨어졌어요. 보내주세요.’ 막내 기저귀를 대거 주문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다 떨어지다니. 일과표에 바로 ‘기저귀 주문’이라고 적었다. 이렇게 적어놓지 않으면 까먹기 십상이다. 슬프게도 우리 아이는 엄마가 제때 기저귀를 갖다 주지 않아 남의 기저귀를 빌려 쓰는 단골 원아 중 한 명이다.
이날은 오전 11시 반 인터뷰도 하나 예정돼 있어 이동하며 급히 전화통화도 한 통 했다. 덕분에 취재원과의 약속시각에 5분 늦게 도착했다.
취재를 하고 기사를 마감하고 다음 일정을 짜고. 정신을 차리니 어느 새 퇴근시각이었다. 멍 때릴 시간은 커녕 계획한 일을 다 마무리하는 데만도 시간이 빠듯했다. ‘못한 일은 집에 가서 틈을 봐 해야지’라고 늘 생각하지만 단 한 번도 그렇게 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집에 가면 제2의 근무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엄마, 집에 과일이 다 떨어졌어요. 과일 사주세요.”(첫째) “내일 소방훈련한대요. 여벌 양말 꼭 넣어주세요.”(둘째) “주먹밥거리 주문했어? 김도 주문했지?”(남편)
주말에도 ‘멍 때릴 자유’를 누리긴 쉽지 않다. 지난 주말 비가 올 거라는 예보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모두 이끌고 가까운 수족관을 찾았다. “엄마, 오늘은 어디 가요?”하고 아침부터 보채는 아이들 등쌀에 어쩔 수 없었다. 관람 후 점심을 먹고 인근 전망대를 둘러 보니 하루가 훌쩍 갔다.
이날은 마침 회사 일정으로 귀가까지 늦어졌다. 아이들과 남편이 잠든 집, 고요했지만 집안 곳곳은 남편이 아이 셋을 건사하느라 고군분투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여기저기 던져진 장난감과 종이조각으로 엉망인 거실, 부엌 싱크대에 놓인 설거지거리, 화장실 앞 가득한 빨래까지. 모두 정리하고 나니 두어 시간이 흘렀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마주했다. 아침에 눈을 뜬 지 꼭 17시간 만에 마주하는 천장이었다.
잘 살고 있는 거겠지? 이런 걸 곱씹어볼 새도 없이 또 하루가 가버렸지만. 오늘 내내 갈망한 ‘멍 때리는 시간’이었건만. 야속하게도 나는 5분이 못돼 잠이 들어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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