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호사와 의료기사 등이 포함된 보건업은 주당 근로시간 상한이 없는 특례업종이지만, 노사가 서면으로 합의하지 않으면 다른 직종과 똑같이 주 52시간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민노총 보건의료노조 산하 병원 노조 대다수는 특례 적용을 거부하고 있어 의료 현장의 혼란이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2일 오후 서울대 병원 응급살 앞을 의료진이 니자고 있다.
경기 A 요양병원에선 70세가 넘은 의사가 야간에 혼자서 노인 입원환자 200여 명을 돌보게 될지도 모른다. 현행 의료법상 요양병원은 야간(오후 6시~오전 9시) 당직 의사를 둬야 한다. 현재는 15시간 근무가 되는 데 1일부터 시행된 주 52시간 근로제에 맞추려면 현재 1명인 당직 의사를 2명으로 늘려야 한다. 원장 B 씨는 “높은 연봉을 주고 젊은 의사를 데려올 형편이 안 된다”며 “진료 현장에서 은퇴한 고령 의사를 찾고 있다”고 말했다.
● 과로가 일상인 의료 현장, 주 52시간 충격 커
주 52시간제 시행을 맞은 의료 현장 곳곳에서 예상치 못한 혼란이 나타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노총) 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조사에 따르면 간호사와 방사선사 등 보건업 종사자 중 주 52시간 초과 근로자 비율은 10.8%에 이를 정도로 장시간 근로가 일상화돼있다. 이런 상태에서 준비 없이 주 52시간제를 맞으니 충격이 클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의사와 간호사, 방사선사 등이 포함된 보건업은 운송업 4개 업종(육상, 수상, 항공, 기타)과 함께 ‘근로시간 특례업종’으로 지정돼 있다. 다른 업종과 달리 주당 근로시간 상한이 없다. 4시간 일할 때마다 30분씩 주어지는 의무 휴게시간 조항에서도 제외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노사가 특례 조항을 적용하기로 합의했을 때만 가능한 얘기다. 병원 측이 근로자대표와 서면으로 합의하지 않으면 의사와 간호사도 다른 업종과 똑같이 주 52시간제를 지켜야 한다. 현재 주 52시간제가 우선 적용된 근로자 300인 이상 중대형 종합병원 대다수는 아직 노사 합의를 이루지 못한 상태다. 보건의료노조는 “특례 조항을 적용하면 사실상 ‘무제한 근로’가 가능해진다”며 특례 적용을 거부하고 있다.
● 구인난에 시달리는 응급환자 부서
새 일손을 뽑으면 해결될 일이지만 사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다. 상당수 권역외상센터가 지방에 있는 데다 업무강도가 높기로 유명해 구직자가 기피하기 때문이다. 보건복지부가 3월부터 권역외상센터의 간호사 추가 채용 인건비(1명당 연 4000만 원)까지 지원하고 있지만 부산대병원과 원주세브란스기독병원에선 오히려 간호사가 1명씩 줄었다. 기존 인력도 붙잡기 어려운 상태라는 뜻이다.
중환자실도 마찬가지다. 대형병원 중환자실 간호사는 3교대로 주 48~52시간 일하는 경우가 많지만 지방병원은 인수인계를 명목으로 하루 2, 3시간씩 초과근로를 하는 게 보통이다. 한 중환자실 간호사는 “동료가 환자에게 심장 마사지를 벌이는 판에 누가 ‘주 52시간제를 지키겠다’며 퇴근할 수 있겠느냐”며 “결국 위법을 피하기 위해 시간외수당도 받지 못하고 일하게 될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 ‘11시간 연속 휴식’ 조항도 복병
노사가 특례업종 적용에 합의해 주 52시간제 적용을 피하더라도 9월부터 시행될 ‘연속 11시간 휴식’ 조항이 복병이 될 전망이다. 자정에 퇴근하면 다음날 오전 11시까지는 반드시 쉬게 하는 식으로 최소한의 휴식권을 보장하는 것으로 특례업종에만 적용되는 조항이다. 이게 적용되면 의료진이 온콜(on-call·비상대기) 상태에 있다가 응급수술을 하는 일이 불가능해진다.
서울의 한 대학병원 혈관이식외과에서 일하는 임상강사 박모 씨(37)는 “새벽에 응급 이식수술을 했다고 다음날 예정돼있던 정규 이식수술을 취소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서울의 한 대학병원은 아예 특례업종 적용을 포기했다. 연속 11시간 휴식보다는 주 52시간제를 지키는 게 차라리 쉬울 것 같다는 이유에서다.
조건희기자 becom@donga.com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