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명문 기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발해 지배층의 글씨체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정혜공주 묘비명(貞惠公主 墓碑銘)’(780년), ‘정효공주 묘비명(貞孝公主 墓碑銘)’(792년경), ‘함화 4년명 불비상 명문(咸和四年 銘佛碑像 銘文)’(834년)이 있다. 이들 글씨는 기본적으로는 한민족의 특성을 가지고 그 조성 시기에 걸맞게 중국화된 특징이 드러나서 고구려 후기나 통일신라의 글씨체와 유사하다.
우선 획의 방향이 가지런하지 않고 제각각이며 글자의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균형이 맞지 않는다. 가로와 세로 줄을 맞추었으나 고르지는 않다. 마지막 부분이 치켜 올라가고 있는데, 이는 중국 글씨체에서 주로 보이는 특징으로 중국의 영향인 듯하다. 획의 굵기와 길이의 변화가 있고 위아래로 다소 긴 특징을 보여주는데 이는 열정, 팽창 의욕, 적극성, 실천력, 진취적 기상을 의미한다. 남송의 섭륭례(葉隆禮)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편찬한 ‘거란국지(契丹國志)’에서는 “발해 사람 셋만 모이면 범 한 마리를 당해낸다”고 했다.
발해의 와당에서도 한민족의 글씨체가 발견되어 발해가 한민족의 국가라는 사실이 확인된다. 자유분방해서 도식적이고 일정한 법칙을 따르는 중국의 글씨체와는 다르고, 부드러운 선이 흐르고 있어서 말갈족의 글씨체와도 다르다. 명문 기와를 보면 좌우가 균형을 이루지 않고 글자 크기가 컸다가 작았다가 하는 등 고르지 않으며 선의 방향도 일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제멋대로이다. 또 선이 가파르지 않고 부드럽고 원만하다. 자유롭고 활력이 있으며 성격이 급하고 변덕스러우며 선량한 한민족의 특성이 드러난다.
유득공은 ‘발해고 (渤海考)’의 서문에서 “무릇 대씨는 누구인가? 바로 고구려 사람이다. 그가 소유한 땅은 누구의 땅인가? 바로 고구려 땅으로, 동쪽과 서쪽과 북쪽을 개척하여 이보다 더 넓혔던 것이다”라고 했다. 글씨체로도 이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다.
구본진 변호사·필적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