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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김형석]다시 한 번 정의란 무엇인가, 반성해 보자

입력 | 2018-07-10 03:00:00

적폐 해소는 꼭 필요하지만 ‘우리만 정의 야당은 폐습’은 위험
정의는 ‘인간애의 의무와 책임’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

인간은 사회적 존재다. 개인은 자유가 없는 사회를 원치 않으며, 사회는 평등이 없는 삶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갈등을 해소하는 소중한 가치가 정의다. 특히 정치사회와 경제생활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17세기를 대표하는 사상가 B 파스칼은 정의와 현실관계를 언급하면서 뜻깊은 글을 남겼다. ‘왜 그대는 나를 죽이려 하는가. 그대는 강 건너편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냉전시대에는 모스크바에 사느냐, 워싱턴에 사느냐가 정치적 정의의 표준이 됐다. 지금도 우리는 서울에 사는가, 평양에 사는가에 따라 삶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고 있다. 그것까지는 역사적 폐습이라고 받아들여도 할 수 없다. 아직도 우리는 같은 사례를 가지고 어느 정권에서 일어났는가를 묻는 때가 있다. 정치 지도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이 여야의 위치에 따라 상반되는 판단을 내린다. 판단에 그치지 않는다. 어느 사회에서도 용납될 수 없는 편 가르기와 집단이기주의에 빠진다. 그 결과는 국민 전체의 고통과 불행의 원인이 된다. 심하게 되면 혁명을 앞세우는 투쟁의 원인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정의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진정한 의미의 보수나 진보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의 보수는, 자유민주의 정의관을 받아들이고 있다. 정의는 더 많은 사람이 자유를 누리며 선의의 경쟁을 통해 행복을 찾아가는 길이다. 이에 비하면 우리의 진보진영은, 정의는 평등한 사회를 창출해내는 방법과 과정의 추진력이라고 믿는다. 평등한 사회가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의 갈등 속에서 시련과 고통을 치르곤 한다. 현 정부가 출범하면서는 그 현상이 더 뚜렷해지는 느낌이다. 약속했던 협치는 거짓말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행정상의 협치도 중하나 자유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는 평등을 기대했던 것이다. 캐나다나 영국을 비롯한 많은 국가들은 그런 수준의 사회평등의 방향과 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170년 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정의와 평등의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DJ 정부 때는 국민의 다수가 진보정책을 수용할 수 있었다. 경제정책에 있어서는 더욱 그랬다. 그러나 현 정부의 경제 사회관은 운동권 학생들이 교과서와 같이 믿고 따르던 옛날의 이념적 가치를 정의로 여기는 것 같다.

오래전에는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교통편이 하나뿐이었다. 기차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그러나 고속도로가 생기고 비행기를 탈 수 있는 발전적 변화는 예상하지 못했다. 같은 기차라고 해도 지금은 고속철도(KTX)가 주역을 맡고 있다. 세계역사도 그렇다. 170년 동안에 정치는 물론 경제계의 발전적 변화는 예상을 초월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경제이념을 따라야 한다고 믿고 주장했던 국가들은 모두가 세계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져갔다. 러시아가 그랬고, 중국이 같은 길을 택했다. 북한의 실정은 더 숨길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들었던 한 일본 교수의 말이 기억에 떠오른다. 20대에 마르크스를 모르면 바보였으나 30대까지 믿고 따르는 사람은 더 모자란 바보라는 경고이다.

적폐는 해소되어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하면 정의가 되고 야당이 한 것은 폐습이라는 사고는 위험하다. 적폐를 수술하는 것은 법과 권력으로 하는 것도 중요하나, 선한 사회질서와 법이 동반해야 한다. 건강한 사람도 계속해서 수술만 받으면 환자는 건강을 회복하지 못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정권을 잡으면 모든 과거를 적폐로 보았다. 그래서 투쟁과 혁명을 계속했다. 그러는 동안 사회적 전통과 인간 간의 질서가 병드는 결과를 초래했다. 사회 문제에는 흑백이나 모순 논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중간만이 실재하는 법이다. 중간 존재를 거부하는 극우와 극좌적 사고는 언제나 위험하다. 강 이쪽과 저쪽에서 우리는 옳고 너희는 배제되어야 한다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세계역사가 공산주의나 합리주의보다 경험주의 국가를 지향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양극이 아닌 중간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의란 어떤 사회적 가치를 염원하는가. 정의는 개인의 자유와 사회적 평등을 공유하면서도 더 높은 행복의 가치를 추구하는 ‘인간애의 의무와 책임’인 것이다. 더 많은 사람이 더 큰 행복을 스스로 찾아 누릴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임무를 맡아야 한다. 사랑의 질서와 행복을 배제하는 정의는 목적을 상실한 투쟁의 고통을 남길 수도 있다.
 
김형석 객원논설위원·연세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