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린 현지 기업인 모임 참가자들과 악수를 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폼페이오 장관은 북한을 향해 “‘베트남의 기적’을 따르라”고 촉구했다. 주베트남 미국대사관 제공
주성하 기자
북한으로선 종전협정을 맺고 핵 목록 신고를 하면 적어도 북-미 대표부 정도는 개설하고, 미국에 핵 검증을 맡기면 북-미 수교와 체제보장 선언 정도는 받아낼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반면 미국은 요구는 섬세하지만, 보상에 대해선 ‘일단 빨리 다 내놓으면 그 다음은 만사 오케이’라는 식이다.
폼페이오 장관이 8일 베트남에서 한 발언이 대표적 사례다. 그는 “김정은이 기회를 잡는다면, 미국과의 정상적 외교 관계와 번영으로 가는 베트남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 기회를 잡으면 베트남의 기적은 당신(김정은)의 기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언론은 ‘미국이 베트남의 기적을 북한의 롤모델로 제시했다’고 보도했다.
베트남이 미군 유해 송환으로 신뢰를 쌓고 미국과 국교 수립을 했고 각종 제재를 푼 뒤 국제기구에 가입한 것은 사실이나, 이는 전형적인 미국의 시각이다. 그러나 김정은의 시각에서도 보자. 베트남은 30년 넘게 개혁개방 정책을 펴고 있는 나라지만 현재 1인당 국민소득은 2000달러 남짓(세계 130위권)이다. 과연 김정은의 눈에 베트남이 ‘번영의 기적을 쓰고 있는 롤모델’로 보일까.
폼페이오 장관이 북한에 베트남을 롤모델로 언급한 것은 그만큼 미국이 얼마나 북한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또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방증이다. 중동에서 수없이 되풀이된 미국의 특정 국가에 대한 몰이해, 그로 인한 실패들이 똑같은 방식으로 북한에서 반복될까 봐 우려스럽다.
차라리 미국이 26년 동안 집권하며 싱가포르의 번영을 이끈 리콴유의 길을 따르라 했다면 김정은은 더 솔깃했을 것이다. 리콴유는 장남인 리셴룽이 총리가 된 뒤에도 90세 가까이 ‘선임장관’이란 이름으로 나라를 실질적으로 통치했고, 죽은 뒤에도 ‘국부’로 추앙받고 있다. 싱가포르는 북한과 마찬가지로 강국에 둘러싸여 늘 안보 위협 속에 살아왔음에도 일당독재를 유지했고, 국가가 기업을 경영하며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성장에 성공했다. 김정은이 매력을 느낄 요소가 베트남에 비교할 바가 없이 많은 나라다.
그 밖에도 김정은이 롤모델로 참고할 나라는 많다. 싱가포르처럼 가난한 어촌에서 세계적 도시로 성장한 중국의 ‘선전(深(수,천)) 모델’은 어떤가. 리콴유도 “선전의 미래는 곧 중국의 미래”라고 예언했다. 선전은 중국식 시장경제의 시험무대로 대성공을 거두었고, 중국 개혁개방의 기관차가 됐다. 북한에도 개성, 신의주, 나선처럼 선전의 역할을 할 도시들이 있다. 또 선전을 만든 덩샤오핑(鄧小平)이 모방했던 박정희식 개발모델도 있다.
위의 사례들은 모두 세계에서 평가받는 모델들이지만, 다 과거일 뿐이다.
김정은에게 보여줘야 할 미래는 베트남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어야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김정은이 북한 주민들을 위해 다른 미래를 볼 것이라는 진심을 보았다”고 했다. 그 진심을 나도 보았기에, 진심으로 이런 글을 쓰는 것이다.
주성하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