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해윤 기자]
지난해 3월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선고 전 당시 조현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 사령관이 한민구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한 문건은 헌법재판소(헌재)의 대통령 탄핵 선고 이후 심각한 치안 불안 상황을 가정해 작성됐다. 촛불집회 또는 태극기집회 측이 헌재의 결정에 불복해 청와대나 헌재에 진입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 위수령을 발령하고 계엄선포를 할 수 있다는 게 주요 내용. 기무사 문건은 기무사가 위수령과 계엄을 검토했을 뿐 아니라, 실제 계엄 상황에서 어느 부대를 어디에 배치할 것인지 계획까지 세웠다는 점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자칫 ‘제2의 5·18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던 것 아니냐는 얘기다.
기무사 문건 공개로 계엄령 논란을 촉발한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을 7월 10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기무사 계엄령 문건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가 뭐라고 보나.
“군이 우리 시민을 바라보는 인식이 가장 큰 문제다. 주권자인 국민이 주도하는 평화로운 집회를 작전대상으로 삼아 과거식 표현처럼 ‘군홧발로 짓밟는다, 총칼로 억누른다’는 발상을 한 것 자체가 위험하다. 군인의 총구는 적을 향해야지, 시민을 향해서는 안 된다. 대한민국 군이 지금도 그런 발상을 한다는 게 무섭다. 제도적으로는 민주화가 정착됐음에도 여전히 군의 의식 한켠은 민주화가 안 된 것이다.”
군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질서 유지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군이 스스로 질서 유지의 최후 보루라고 생각하는 것도 난센스다. 자칫하면 제2의 5·18, 서울판 5·18이 될 수도 있었다. 광화문광장에 100만 대중이 운집했을 때 군이 동원됐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이 벌어졌겠나. 백번을 양보해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 계엄령을 검토했더라도 그건 기무사가 할 일이 아니다. 합동참모본부(합참)에 계엄과가 따로 있다. 전쟁이 나면 유사시 어떻게 대응한다는 작전계획이 마련돼 있는 것처럼, 계엄과에는 계엄 관련 매뉴얼이 준비돼 있을 것이다. 그런데 민주주의 국가에서 군이 평화롭게 집회하는 시민을 대상으로 작전을 상정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시민 진압하라고 국민 세금을 들여 무기를 사준 것은 아니지 않나. 기무사 문건에 보면 전방에 있는 사단 병력을 빼내 계엄군으로 쓴다고 돼 있다. 이는 오히려 안보 공백을 자초하는 것 아닌가.”
안보 공백 자초한 계엄령 문건
송영무 국방부 장관이 7월 10일 서울 국방부에서 지난해 탄핵 정국 당시 국군기무사령부의 계엄령 검토 문건에 대한 대통령 특별수사 지시를 발표한 뒤 고개 숙여 인사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계엄령 문건 수사와 관련해 독립수사를 지시했다.
“3월 중순 관련 문건이 송영무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됐다. 그런데도 넉 달이 다 되도록 관련 조사를 하지 않았다. 대통령의 독립수사 지시는 이에 대한 질책이 담긴 것이다.”
계엄령 문건이 누구 지시로 만들어졌다고 보나.
이 의원은 “누구를 사법처리하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누가 무슨 이유로 어떤 과정을 거쳐 계엄령 문건을 만들었는지 전말을 밝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무사 개혁안 발표를 앞둔 시점에 계엄령 문건이 공개됐다. 기무사 개혁과 이번 문건이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 아닌가.
“관련이 있으면서도 없다.”
무슨 뜻인가.
남북, 북·미 정상회담 이후 북한에 대한 주적 개념이 희미해진 상황에서 기무사 기능까지 축소하면 대북 안보 태세가 약화될 수 있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냉정하게 따져보자. 우리가 집권했을 때와 야당이 집권했을 때를 비교하면 언제 안보가 더 튼튼했나. ‘노크 귀순’으로 전방이 뻥뻥 뚫리고 연평도 포격을 당한 게 어느 정부 때였나. 우리는 연평해전에서 이겼다. 국방비도 참여정부 때 더 많이 확대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 때 줄였던 국방비를 다시 늘리고 있다. 안보 불안을 얘기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런데 기무사가 전방 부대를 빼내 시민을 진압하는 데 쓰겠다는 문건을 만들었다. 모름지기 안보 정당이라면 안보에 구멍이 뚫리는 그런 문건을 왜 만들었느냐고 앞장서 문제점을 지적하고 질타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도 ‘왜 기무사를 건드느냐’고 한다. 자신들이 집권하면 기무사를 악용해 정권 도구로 쓰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주장이다”
“안보 구멍 방치하는 야당 이해 안 돼”이 의원은 대북확성기 문제를 예로 들었다.
“박근혜 정부 때 대북심리전을 한다고 큰돈 들여 확성기를 사들였다. 그런데 성능시험을 해보니 엉터리였다. 비무장지대(DMZ)를 지나 북한 마을까지 소리가 전달되도록 하는 게 확성기 설치 목적이었다. 그런데 소리가 멀리 나가지 않는 불량 확성기를 납품받았다. 이렇게 엉터리 확성기가 납품되면 대대적으로 발본색원하자고 따지는 게 안보 정당이 할 일 아닌가. 그런데 그 문제를 꺼내면 ‘확성기 없애자는 거지’라며 본말을 전도한다. 그렇게 중요하다는 확성기가 불량품이었으니 잘못된 부분을 따져 바로 고치는 게 진짜 안보를 중시하는 사람의 태도 아니겠나. 입으로는 안보가 중요하다면서 실제 안보에 구멍이 뚫리는 상황은 방치하는 모습이 이해가 안 된다.”
북핵 폐기를 위한 가시적 성과가 없는 상황에서 한미연합훈련을 중단한 데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과거 김영삼 정부 때도 팀스피릿(현 을지프리덤가디언)을 쉰 적이 있다. 지금은 북한을 대화의 장으로 나오도록 유도하는 단계다. 북한은 현재 핵실험을 하지 않고 미사일 도발도 중지했다. 대화를 가속화하고자 훈련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것은 가능하다고 본다.”
한동안 급물살을 타던 북핵 폐기 논의가 북·미 정상회담 이후 오히려 소강 상태에 접어들었다. 북핵 문제 해결 가능성을 어떻게 보나.
“상당한 일진일퇴가 있을 것이다. 고비가 여럿 남아 있고 가야 할 길도 멀다. 그렇지만 가지 않을 수 없는 길이다. 남북긴장이 완화되고, (북한이) 핵실험을 하지 않고 미사일을 쏘지 않는 것은 성과다. 공고한 평화체제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뿐 아니라 주변국과 관계도 중요하다. 당장 성과가 보이지 않는다고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지 않은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회 위원장이 시간만 끄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만약 대북제재의 대오가 흐트러졌다면 그런 지적은 타당하다. 그런데 현재 우리가 대북제재와 압박 기조를 유지 중이고, 국제 공조도 튼튼히 하고 있다. 우려는 표할 수 있지만 현 상황에는 맞지 않는 기우다. 지금은 북한이 대화를 통해 평화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여건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북핵 폐기에 진정성이 있느냐 없느냐만 따지면 서로에 대한 의심만 싹틀 뿐이다. 과거 로널드 레이건 미국 대통령이 소련과 협상할 때 이런 말을 했다. ‘믿어라, 그러나 검증하라.’ 북핵 폐기에 진정성이 있다 없다를 두고 논쟁만 하면 뭐가 달라지겠나. 먼저 믿고 대화해보자. 그러면서 검증하자.”
촛불집회 사상 가장 많은 시민이 참가한 2016년 12월 3일 서울 광화문광장의 6차 촛불집회 광경. [동아DB]
대화하면서 진정성을 검증하는 게 낫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진전이 있으면 북한도 되돌아가기 어렵다. 대화에 좀 더 진전이 있으면 이게 사는 길이라고 느낄 테다. 내가 듣기에 북한 엘리트 사이에 베트남이나 중국식 개혁·개방에 대한 컨센서스가 있다고 한다. 그 전제하에서 김정은 위원장이 움직였다는 것이다. 단순히 예봉을 피하려는 쇼로 보기엔 현 북한 사정이 녹록지 않다고 한다. 어쩌면 정말 힘든 상황에 내몰릴 것을 걱정해 대화에 나섰을 수도 있다. 김 위원장이 북한 주민들에게 배곯지 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나. 지금 북한 정권이 3대째다. 배고프면 어느 국민이 계속 정권을 믿고 따라가려 하겠나. 한 번은 속고, 두 번은 관성대로 따라왔지만, 세 번째로 정권을 잡은 새파란 지도자가 사람 죽이고 배고프게 해서는 계속 버틸 수 없다. 김 위원장이 선해서라기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정권 유지가 안 된다고 판단했을 수 있다.”
북핵 문제 해결 과정에서 우리의 역할은 뭔가.
“우리는 북·미 대화의 중재자이자 대화 촉진자여야 한다. 그러면서 북핵 문제 당사자이기도 하다. 북·미 대화에 진전이 있도록 양쪽을 잘 거들어야 한다.”
안보기득권 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을 텐데….
“현 질서에서 이득을 보는 기득권 세력은 변화를 피하려고 이런저런 행동을 할 것이다. 그렇기에 변화를 만들고자 하는 사람이 두세 배 더 노력해야 한다. 고단하지만 가야 할 길이다.”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징벌적 대체 복무는 당분간 불가피”
기간은 현역 2배, 하는 일도 중증장애인·치매노인 돌봄 등 중노동으로 헌법재판소(헌재)는 6월 28일 병역 종류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를 규정하지 않은 병역법에 대해 재판관 6(헌법불합치) 대 3(각하) 의견으로 헌법불합치 결정을 선고했다. 특히 헌재는 병역 종류를 규정한 병역법 규정이 2019년 12월 31일까지 대체복무제를 포함하는 내용으로 개정돼야 하며, 개정 전까지는 그대로 적용된다고 밝혔다.
이번 헌재 결정으로 대체복무제에 대한 공은 국회로 넘어왔다. 국회 국방위원회 여당 간사를 맡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은 대체복무제에 어떤 견해를 갖고 있을까.
헌재 결정으로 대체복무제 입법이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내년 말까지는 입법을 마무리해야 한다. 현재 국회에 관련 법안이 3개 올라와 있는데 아직 국회에서 논의해보지는 않았다.”
6월 28일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양심적 병역거부 관련 헌법불합치 결정이 내려진 가운데 시민단체 회원 등이 헌법재판소 앞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동아DB]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대체복무제가 도입되면 국민개병제에 빈틈이 생기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있다.
“병역 기피의 실익이 크다면 빈틈이 생길 수 있지만, 복무 기간을 늘리고 복무 내용도 강하고 힘들게 만들면 그런 시도는 없을 것이다. 중증장애인 수발이나 치매노인 케어 등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일이라면 어지간한 사람은 병역 기피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것이다. 또 독립된 기구에서 엄격하게 심판한다면 병역 기피자를 충분히 가려낼 수 있다.”
복무 기간은 어느 정도가 합당하다고 보나.
“현역 복무 기간보다는 길어야 하지 않을까. 개인적으로 현역 복무 기간의 2배 정도가 어떨까 싶다.”
복무 기간이 더 길고 힘든 일을 해야 한다면 역차별 논란이 제기될 수도 있다.
“대체복무에 징벌적 성격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반론이 나올 수 있다. 맞는 얘기다. 하지만 병역은 우리 국민에게 특히 예민한 문제다. ‘유전면제, 무전입대’에 대한 정서적 거부감이 강하다. 그런 정서를 감안해 대체복무 관련 입법을 해야 한다. 당장은 병역 거부로 인한 대체복무가 병역 면탈 수단으로 악용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다. 시간이 흘러 정상화되면 징벌적 성격을 완화할 수는 있을 것이다.”
|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147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