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수 사회부 차장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지난달 1일 오후 2시 경기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연 기자회견 때 맨 처음 한 발언이다. 지난해 9월 퇴임 뒤 250여 일 동안 침묵을 지키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을 가라앉히기 위해 한 회견 서두에 ‘동해안… 여행’을 언급한 배경은 뭘까.
양 전 대법원장은 회견에서 “검찰서 수사한답니까?”라며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수사에 사실상 반대 의사를 나타냈지만, 김명수 대법원장의 ‘수사 적극 협조 방침’ 공개 이후 검찰 수사가 이어지고 있다. 법원 내부에는 양 전 대법원장의 회견이 여론을 악화시켜 검찰 수사를 부추겼다고 생각하는 판사들이 적지 않다.
다비식을 주관한 정휴 스님은 기자와의 통화에서 “양 전 대법원장이 오전 10시부터 1시간 가까이 진행된 영결식과 그 뒤 4시간 동안 이어진 다비식 때도 있었다”고 말했다. 정휴 스님은 “법조계 수장이던 양 전 대법원장은 오현 스님의 세속 상좌(제자) 중 한 명”이라고 했다. 오현 스님은 짧지만 울림 있는 화두를 자주 던졌던 선(禪) 시조의 대가다.
양 전 대법원장은 재직 중 오현 스님을 종종 언급했다. 대법원장 퇴임사 마지막 대목은 ‘고목 소리 들으려면’이라는 오현 스님의 시였다. ‘속은 으레껏 썩고/곧은 가지들은 다 부러져야/굽은 등걸에/매 맞은 자국들도 남아있어야.’ 사법헌정사(70년)의 3분의 2 가까운 42년간 판사로서 2, 3차 사법파동을 지켜본 자신을 ‘모진 풍상을 이겨낸 고목’에 비유한 것으로 해석된다.
2011년 9월 양 전 대법원장의 국회 인사청문회에서도 오현 스님이 거론됐다. 기독교 신자인 양 전 대법원장이 존경하는 인물은 오현 스님이고, 스님의 권유로 만해 한용운을 기리는 상의 심사위원장을 맡았던 일이 공개됐다. 당시 양 전 대법원장은 “(지방법원 부장판사 시절) 설악산에 등산을 여러 번 가면서 마침 백담사에 거처하고 계시던 스님과 이야기를 하던 중 워낙 넓으신 포용력과 인격에 감읍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회견에서 밝힌 대국민 메시지는 오현 스님의 울림이 큰, 짧지만 굵은 가르침에 크게 못 미쳤다.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하는 판사들이 많다.
당시 회견을 지켜본 판사들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법원 내부에선 “책임을 회피하고 아랫사람들에게 미루는 모습으로 비쳤다”는 반응이 나왔다.
양 전 대법원장은 시대가 공감할 만한 화두를 던진 오현 스님의 뒤를 따를 수 있을까. 그는 회견에서 “상황을 정리해 말씀을 드릴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고 했다. 부디 다음엔 많은 후배 판사들이 공감할 묵직한 메시지를 밝히길 기대한다.
정원수 사회부 차장 need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