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뒤샹 ‘여행가방 속 상자’. 1941년.
‘여행가방 속 상자’는 마르셀 뒤샹의 이런 고민에서 시작된 작업이다. 1917년 남자 소변기에 ‘샘’이라는 제목을 붙인 후 미술이라 주장했던 바로 그 작가다. 작품을 발표할 때마다 논쟁을 일으켰던 뒤샹은 1923년 돌연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체스 게임에 전념했다.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체스에 몰입해 살면서도 작업을 전혀 안 한 건 아니었다.
1941년 여름, 54세의 뒤샹은 오랜 공백을 깨고 아주 특별한 회고전을 열고자 했다. 언제 어디서든 전시 가능하고 운송비용은 전혀 들지 않는 스마트하고 경제적인 회고전을 원했다. 그 결과 가죽으로 된 여행가방 안에 자신의 대표 작품들이 미니어처 형태로 들어 있는 일종의 ‘휴대용 미술관’이 탄생했다. 상자 버전은 그 이전부터 만들어졌지만 여행 가방을 이용한 고급 에디션은 1940년 말부터 제작됐다. 베네치아 페기구겐하임 미술관이 소장한 이 작품은 루이비통 가죽 여행 가방을 이용한 고급 에디션 1번 작품으로, 제작비를 댄 페기 구겐하임을 위해 만들어졌다. 메추리알만 한 크기로 재현된 ‘샘’과 모나리자에 콧수염을 그려 넣은 ‘L,H,O,O,Q’ 등 그의 대표작 60여 점으로 구성돼 있어 마치 뒤샹의 ‘종합선물세트’ 같다.
여행 가방 속에 넣어 어디든 들고 다닐 수 있는 ‘휴대용 미술관’은 전쟁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여행과 이동이 잦았던 뒤샹이 선택한 가장 효율적인 전시 방법이었을 것이다. 총 300여 점의 에디션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뒤샹은 다른 작가들이 생각지도 못한 기발한 방법으로 회고전만 300회를 치른 셈이다.
이은화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