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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 안에 기업 400개… 산학협력 통해 4차산업 허브 급성장

입력 | 2018-07-21 03:00:00

[대학이 살린 도시, 현장을 가다]스웨덴 룬드大와 룬드市의 혁신




스웨덴 룬드에 건설되고 있는 ‘파쇄중성자원(ESS)’은 조용한 교육 도시를 첨단 산업이 이끄는 미래 도시로 키우는 핵심 동력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ESS 제공

“세계에서 가장 큰 중성자 연구시설을 짓고 있습니다. 52개국에서 모인 연구원 등 인재들이 세계 각국의 기업과 대학이 의뢰하는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할 것입니다.”

올 5월 찾은 스웨덴 최남단 도시 룬드의 ‘파쇄중성자원(ESS·The European Spallation Source)’ 신축 공사장. 임시 사무실 옥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흙바람 사이로 크레인 10여 대가 고개를 주억이며 공사를 하고 있었다. 규모가 너무 커서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는 무엇을 짓는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ESS는 2032년까지 단계별로 완공될 예정이다. 500여 명의 인력이 세계 각지의 기업과 대학이 연구개발을 의뢰한 프로젝트를 한 해 3000여 건 수행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사업규모는 4조 원가량. ESS가 완공되면 인구 2만여 명이 룬드에 유입돼 도시 성장을 이끌 전망이다.

프로젝트 책임자인 맨 린드루스 씨는 “유럽 각국에서 참여한 여러 도시와의 경쟁 끝에 ESS 유치에 성공해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과 가깝고 4차 산업 허브로 떠오르고 있는 룬드에 ESS를 조성키로 했다”고 말했다.


○ ‘외레순 벨트’로 성장 동력 찾은 교육 도시

룬드는 20여 년 전만 해도 조용한 교육도시였다. 1666년 설립된 명문 룬드대를 제외하곤 지역 산업도 없었다. 하지만 이곳은 이제 미래형 도시로 탈바꿈했다. ESS와 가속기 ‘맥스IV’ 등 핵심 과학 연구시설과 4차 산업을 이끄는 기업 및 연구 인력이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룬드의 혁신 비결 중 하나는 ‘동반 성장’이었다. 이웃 도시인 말뫼는 물론 인접국 덴마크 수도 코펜하겐과도 경쟁하기보다 함께 성장을 도모했다. 기차로 코펜하겐에서 말뫼까지 1시간, 말뫼에서 룬드까지는 20분이다.

말뫼와 룬드는 지리적으론 가까웠지만 성격은 크게 달랐다. 말뫼는 조선의 도시로 번창했던 반면 룬드는 한적한 교육 도시였다. 두 도시는 2000년 외레순 해협을 가로지르는 외레순 대교 개통을 계기로 운명공동체가 됐다.

말뫼는 1980년대 후반부터 한국 등 아시아 신흥국과의 조선업 경쟁에서 밀려 쇠락하기 시작했다. 2002년엔 골리앗 크레인이 현대중공업에 단돈 1달러에 매각되며 ‘말뫼의 눈물’을 흘렸다. 기반산업이 무너지자 사람도 기업도 도시를 떠났다. 실업률은 20% 가까이 치솟았다. 말뫼 사람들은 1986년 머리를 맞대고 대책을 찾은 끝에 외레순 대교를 놓기로 했다. 이를 통해 ‘코펜하겐-말뫼-룬드’를 이어 생명공학·의학·제약 등 4차 산업 클러스터를 구축하기로 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어서 집세가 저렴한 말뫼에는 코펜하겐 시민들도 늘어났다.

룬드는 룬드대를 활용해 말뫼의 지식허브 역할을 하며 성장했다. 스테판 뮐러 말뫼 명예총영사는 “말뫼와 룬드는 북쪽에 멀리 떨어져 있는 수도 스톡홀름보다는 지리적 심리적으로 코펜하겐과 더 가깝다. 세 도시를 잇는 ‘외레순 벨트’는 국경을 초월해 북유럽을 대표하는 4차 산업 전초기지로 성장했다”고 했다.

○ 혁신의 비결은 ‘구성원 간 합의’


룬드가 말뫼, 코펜하겐과 함께 동반 성장한 데는 룬드대의 역할이 핵심적이었지만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말뫼의 지역 발전 전략에 따라 룬드대는 순수 학문 연구에 치중한 상아탑에서 벗어나 기업과 긴밀히 협력해야 하는 새로운 역할이 필요했다. 하지만 구성원의 반발도 없지 않았다.

맷 배너 룬드대 과학정책과 교수는 “대학이 도시 발전 과정에서 제 역할을 하려면 기업의 지식센터 기능을 보강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성원 간에 새로운 공감대를 형성해야만 했다”고 말했다. 룬드와 룬드대의 혁신 비결로 ‘구성원 간 합의’를 꼽은 이유다.

배너 교수는 “정부는 교수 연봉의 50%를 프로젝트 실적과 연동해 지급하는 혁신을 단행했다. 교수들에게 기업가적 자질을 중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룬드대가 체질을 개선하는 데는 20여 년에 걸친 시행착오가 필요했던 셈이다.

○ 대학-기업 손잡고 가는 ‘이데온 사이언스 파크’

룬드대 캠퍼스에 운영 중인 과학 클러스터 ‘이데온 사이언스 파크’는 대학과 기업, 지역사회가 어떻게 상생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룬드=이설 기자 snow@donga.com

룬드대와 외레순 벨트 지역 기업들 간 협력에는 ‘이데온 사이언스 파크’(이하 파크)도 큰 역할을 했다. 파크는 1986년 중앙과 시 정부, 룬드대, 기업이 대학에서 이뤄진 연구 성과를 산업화하기 위해 만든 과학 클러스터다. 대학 캠퍼스 안에 세워진 파크는 약 12만 m² 규모로 400여 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5월 방문한 파크 건물 외벽에는 기업 간판이 가득했다. 대학과 기업이 한자리에서 성장을 위해 손잡고 나가는 것을 그대로 보여줬다.

파크 내부에는 마이크와 단상만이 있는 툭 트인 공간이 인상적이었다. 미아 롤프 파크 최고경영자(CEO)는 “매일 아침 누구나 이 단상에 올라 연구 내용을 발표하고 아이디어를 교류한다. 투자자의 눈에 띄면 곧장 투자 상담으로 이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파크는 대학과 기업의 인적·물적 교류도 적극 지원한다. 이곳을 통해 룬드대 학생은 원하는 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하고 기업들은 인턴 제도를 통해 우수한 직원을 미리 확보해 서로 윈-윈이다. 파크는 스타트업(초기 벤처 기업)에 투자자를 소개하고 중소기업의 해외 진출도 돕는다. 롤프 씨는 “매년 20개가량의 스타트업을 키워내고 있다”며 “룬드시가 기업 유치로 2022년 북유럽에서 가장 혁신적인 지역으로 성장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룬드시는 대학과 기업 간 네트워킹을 위해 2년 전부터 매주 목요일 ‘인터내셔널 시티즌 허브’도 개최하고 있다. 누구나 단상에서 짧은 연설을 하고 명함을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자리다. 페르 페르손 룬드시 혁신과 비즈니스 홍보 담당자는 “룬드는 달이라는 뜻으로 우주산업을 이끄는 ‘문 빌리지 프로젝트’도 추진해 세계에서 손꼽히는 미래형 도시로 키울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룬드=이설 기자 sno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