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정 국가대전략 월례 강좌로 본 한반도 정세 변화 1년
동아일보 DB
●롤러코스터 탄 한반도 정세
이런 상황은 많은 이들을 고민하게 만든다. 현재의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가. 현 전 장관이 말한 파시가 끝나버린 상황인가?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전후해 트럼프 행정부의 아마추어리즘이 드러나면서 북한 비핵화란 전략적 목표는 아예 물 건너 간 것인가? 아니면 북한 비핵화라는 대물을 거래하는 커다란 파시에 참가한 상인과 소비자들이 잠시 숨을 돌리고 더위를 식히며 더 큰 흥정을 준비하고 있는 시간인가? 그래서 지금은 칼 폰 클라우제비츠가 ‘전쟁론’에서 설파한 ‘전략적 목표를 향한 전술적 휴지기’인가?
앞이 안 보일 땐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라고 했다. 북한이 미국의 독립기념일인 2017년 7월 4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급 화성-14형을 발사한 직후 반기문 전 유엔 사무총장을 시작으로 출발한 화정 국가대전략 월례강좌. 싱가포르 정상회담 직후인 2018년 6월 마크 내퍼 주한 미 대리대사의 강연까지 1년간 강좌에 나선 연사 12명의 발언을 중심으로 현 상황을 복기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 1년의 절반은 한반도에 전쟁 위기를 조성했던 북한의 전략도발국면이었고, 나머지 절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김정은이 대외에 전방위 대화공세를 폈던 기간이었다. 숨 가빴던 한반도 정세를 따라 한 달에 한차례 진행됐던 강좌에 나선 현인들의 발언들은 지금의 상황을 예견했거나, 지금의 상황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될 혜안으로 가득했다.
북한의 전략도발 국면 막바지였던 2017년 12월 11일 제6회 강좌에 연사로 나선 한승주 전 외무부 장관은 김정은의 2018년 평화공세 가능성을 이렇게 예상했다. “김정은의 신년사에 어떤 내용이 담길 것 같으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김정은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 신년사 이후 두 달 만에 2018년 2월 연사로 나온 현 전 장관은 당시 “북한과 미국 간의 ‘큰 타협’이야말로 유일한 대안”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큰 타협의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했다.
●엉성한 로드맵, 북한에 끌려가는 미국
현 전 장관의 지적 중 오로지 마지막 조건만 살아있다. 협상의 조건으로 기존 제재를 풀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회담 직후인 6월 18일 열두 번째 연사로 나선 마크 내퍼 주한 미국대사 대리는 싱가포르 합의에 대한 대내외의 비판을 의식한 듯 이렇게 강조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강조했던 것처럼 북한 비핵화가 이뤄지지 않으면 제재는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있을 것이다. 과거와 달리 과정에 대한 단계적인 조치(제재해제 등 보상)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2018년 11월 중간선거, 2020년 11월 재선에 북한 비핵화 이슈를 활용하겠다는 뜻을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의 정치적인 접근에 대한 우려는 도발국면부터 있었다. 2017년 11월 27일 다섯 번째 연사로 나온 천영우 한반도미래포럼 이사장(전 청와대외교안보수석비서관)의 지적이 대표적이다.
“한 가지 걱정은 트럼프가 완전한 비핵화(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enuclearization)를 공언하고 있고 지금은 결기가 대단해 보이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이 약화될 가능성 높다. 임기가 있고,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이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은 자기 임기 내내 원하는 조건이 아닌 경우에는 계속 거부하면 된다. 트럼프가 시간이 흐를수록 입장이 약화되면 초조한 나머지 핵 동결로 타협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되면 비핵화 공약 없는 동결 수용여부를 둘러싸고 한·미·일 공조체제가 위기를 맞을 수 있다.”
●과거 비핵화 협상 실패의 세 가지 이유
“먼저 북한의 비핵화 실패의 배경은 동북아라는 지정학에 원인이 있다. (비핵화된 북한의) 미래 비전에 대한 양국(미국과 중국)의 이해가 일치되지 않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70년에 걸친 불신이다. 북한의 카드와 미국의 카드는 같은 종류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은 북한이 무슨 핵을 갖고 있고 어떤 물질을 갖고 있는지 신고하고 폐기하고 검증하라고 요구한다. 이는 물리적으로 분명한 행동들이다. 그런데 북한이 미국에 요구하는 것은 다분히 절차적이고 제도적인 것들이다. 어느 누가 먼저 카드를 내놔야 한다. 그런데 북한은 미국에 대해 ‘뭘 믿고 내 목숨이 걸린 물건을 내놓겠느냐’고 하고, 미국은 ‘우리가 어떤 나라인데, 북한의 협박에 굴해서 먼저 양보하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반복하면서 양측의 카드가 불신과 비대칭 형태로 유지되고 있다.
북한이 국제사회에 대해 가지는 불신에 대해 윤영관 전 외교통상부장관(2017년 9월 28일 3회 강좌)은 “우리가 전달해야 하는 메시지는 통일도 정권교체도 아닌 북한의 비핵화라는 정책 체인지임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다. ‘핵을 포기한다면 다른 모든 것들은 당신들이 원해는 대로 해라’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보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2017년 8월 25일 4회 강좌)은 북한의 내부정치 문제를 근거로 “북한에 저런 체제가 존재하는 한 핵미사일을 폐기할 리도, 할 수도 없을 텐데 그 체제는 그대로 두고 ‘핵미사일 폐기’에만 매달렸으니 애초부터 가능할 리가 없었던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핵문제는 남한에 의한 통일로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체제를 그대로 두고 북한 비핵화를 목표로 한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이야기다.
이와는 달리 현 정권의 외교정책 브레인인 문정인 연세대 특임교수(2018년 5월 24일 11회 강좌)는 북한과 미국 모두 과거와는 다른 행동패턴을 보일 것이라고 기대했다.
“북한이 그러한 전술(과거와 같은 살라미 전술, 대화와 도발의 이중전술 등)을 추구한다면 이번 합의 전체가 위험에 빠지게 되고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과거의 패턴과 죄와 벌의 반복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는 분명히 군사 행동과 전쟁 가능성을 키우면서 또 다른 위기로 이어질 것이다. 이러한 가능성을 인지, 한국과 미국은 북한에게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했고 북한은 이러한 과거의 관행으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중략).
●외교안보에 초당적 단합 필요
한반도 정세에 대한 분석과 전망이 엇갈리는 가운데 상황이 현재에 이른 데는 우리 모두의 책임, 특히 정치권의 과오가 크다는 자성론도 나왔다. 김형오 전 국회부의장(2018년 1월 23일 7차 강좌)의 일갈이다.
그렇기 때문에 향후 문제 해결에 있어서 정치권의 단합과 한목소리 내기가 중요하다는 것이 대부분 현인들의 결론이었다.
현인택 송민순 전 장관은 강좌에서 “우리는 북핵문제에 운명이 걸려있는 당사자이므로 강대국들에 대해 우리가 할 말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것이 운전자론이건 무엇이건 말이다. 그런 연장선에서 굳건한 한미동맹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데 보수와 진보를 떠나 12명의 연사 대부분의 인식이 일치했다. 윤영관 전 장관은 “협상안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한국의 이익이 철저하게 반영될 수 있게 상황을 만들어 가야 한다.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 아래 협상단계에서의 로드맵을 만드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많은 관찰자들이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서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지면서 협상의 주도권은 트럼프가 아닌 김정은이 쥐게 되었다고 우려한다. 굳건한 한미동맹이 교착된 북-미 회담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는 다음 1년의 화정 국가대전략 강좌를 통해 면밀히 지켜봐야 할 과제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