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인훈 소설가. 동아일보 DB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 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소설 ‘광장’의 1961년판 저자 서문)
인간 존재의 본질 규명에 주력한 소설가 최인훈의 삶은 해방, 전쟁, 분단으로 이어지는 한국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 했다.
4·19혁명이 있었던 1960년 ‘새벽’지에 발표한 고인의 대표작 ‘광장’은 문단 안팎으로 큰 파장을 가져왔다. ‘광장’은 남북 이데올로기를 동시에 비판한 최초의 한국 소설이자 1960년대 문학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9개의 개정판본이 나왔으며 출간 이후 현재까지 204쇄를 찍었다. 고등학교 교과서 최다 수록 작품이라는 기록도 보유하고 있으며 영어, 일어, 프랑스어 등 6개 외국어로 번역돼 해외에서도 출간했다.
최인훈은 이 작품에서 남북한의 이념에 대한 냉철한 균형감각을 유지하면서 깊이 있는 비판과 성찰을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데올로기 허구성을 드러내는 동시에 개인과 사회의 긴장과 갈등, 인간 자유 등 실존주의적 주제들을 깊이 있게 다뤘다.
‘광장’이란 엄청난 작품에 가려진 느낌이 있지만, 고인은 한국문학에서 지속적으로 회자되는 작품을 여럿 남겼다. ‘회색인’(1963), ‘서유기’(1966),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69), ‘화두’(1994) 등은 발표할 때마다 크게 주목받았다. 1970년 발표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랴’를 비롯해 ‘옛날 옛적에 훠어이 훠이’(1976) 등 희곡 작품 7편을 써 관심을 받았다.
첫 희곡 ‘어디서…’ 초연(1970년)에서 온달모(母) 역으로 제7회 동아연극상 연기상을 받은 배우 박정자 씨(76)는 “군더더기 없고 품격 있는 대사들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의미의 깊이와 함량에 압도당했다”고 말했다. 그는 “고인은 연습장에 자주 오셔서 조용히 리허설을 지켜보고 가시곤 했다. 희곡과 연극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었다”고 떠올렸다.
고인은 단편 ‘바다의 편지’(2003)를 끝으로 새 작품을 내지 않았으나, 이후 기자, 관객들과 만나는 자리에서 수차례 ‘여전히 집필 중’임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가족들에 따르면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도 평론가들과 제자들을 치하하는 한편, 공개되지 않은 본인의 글을 다듬었다고 한다.
특히 고인은 1977년부터 2001년까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교수로도 재직하며 많은 문인들을 배출했다. 이나미 신경숙 장석남 황선미 이병률 강영숙 하성란 백민석 편혜영 등 유명 소설가와 시인이 빼곡하다. 스타 드라마 작가인 김은숙 노희경도 제자다.
이병률 시인(51)은 “선생님은 별이 되셨지만 인류에게 ‘광장’이란 엄청난 상징을 남긴 인물이다”라며 “인류사에 기록될 ‘영원한 청년’으로 남으실 것”이라고 애도했다. 황선미 동화작가(55)는 “선생님은 오랫동안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빈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져 가슴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며 비통해했다.
고인은 올 초 대장암 말기 진단을 받고 경기 고양시 명지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암을 늦게 발견해 암세포가 많이 퍼진 상태였다. 유족에 따르면 그는 지난 몇 달 간의 한반도 해빙 분위기에 관해 “통일보다 재통일이 더 위대하다. 처음부터 통일되어 있어 끄떡없는 것보다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했다가 여태까지의 흐름을 거슬러서, 그렇게 다시 한국이 통일 된다면 참 위대한 일”이라며 “그것이 변증법이라는 말의 진정한 가치”라고 말하기도 했다.
조윤경 기자 yuniqu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