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오늘과 내일/이명건]박근혜의 저항은 실패다

입력 | 2018-07-25 03:00:00


이명건 사회부장

정호성 전 대통령부속비서관의 표정은 편안했다. 낯빛이 청와대에 근무하던 당시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1년 6개월간 복역하고 5월 만기 출소한 직후였다. 박근혜 전 대통령 바로 옆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가 국정농단 적폐의 나락으로 떨어진 그는 영욕(榮辱)을 초탈한 듯했다.

“앞으로 뭘 해야 할지…. 이제부터 생각해 봐야죠.”

그는 1998년 4월 국회의원 보궐선거(대구 달성)에 출마한 박 전 대통령을 처음 보좌하기 시작해 2016년 11월 구속될 때까지 18년 동안 박 전 대통령 곁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출소한 그에게 가족은 “이제부터 농사를 짓건 물고기를 잡건 제발 자신의 삶을 살라”고 했다. 박 전 대통령을 떠나라는 의미다. 그는 고민 중이다.

최순실을 청와대 관저로 실어 날랐던 이영선 전 청와대 경호관은 구속됐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뒤 최근 선교단체를 설립했다. 떠난 것이다.

지난주 박 전 대통령의 국가정보원 특수활동비 수수 혐의 등에 대한 1심 선고 법정 방청권 추첨은 응모 미달이었다. 전체 150석 중 일반인에게 할당된 30석 추첨에 24명밖에 신청하지 않았다. 선고 당일 방청석은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재판 말미 징역 8년 선고에 “이게 법이냐”는 항의가 나오기 전까지 방청석은 조용하기만 했다. 선고는 45분 만에 싱겁게 끝났다. 자유한국당의 반응은 “책임을 통감한다”는 짧은 논평뿐이었다. 다음 날 서울 도심에서 열린 박 전 대통령 석방 촉구 집회 분위기는 느슨했다.

3개월여 전 박 전 대통령의 ‘국정농단 사건’ 1심 선고 때는 그렇지 않았다. 법정은 방청객과 취재진 등 180여 명으로 빈자리 없이 꽉 찼다. 판결이 끝날 때까지 1시간 43분 내내 법정 전체에 팽팽한 긴장이 풀리지 않았다. 재판장의 판결 주문에 방청석에선 무거운 탄식이 흘러 나왔다. 일부 방청객은 눈물을 흘렸다. 선고 직후 법원 앞 도로 점거 항의 집회는 격렬했다. 여당은 “사필귀정”이라고 했고 한국당은 “이 순간을 간담 서늘하게 봐야 할 사람은 문재인 대통령”이라며 대립했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특활비 사건’ 선고가 ‘국정농단 사건’ 선고보다 덜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그 변화가 급격하다. ‘국정농단 사건’에 징역 24년이 선고된 뒤 “가망이 없다”며 고개를 떨군 친박(친박근혜) 정치인과 지지자들이 많아진 건 분명하다. 지난달 한국당의 지방선거 참패에 ‘친박 탈출이 살 길’이라는 생존 본능에 순응한 의원도 적지 않을 것이다. “난 더 이상 친박 아니다” “이제 친박은 남아 있지 않다”고 주장하는 ‘탈박(脫朴)’이 늘고 있다.

하지만 근본 원인은 선고도 선거도 아니다. 박 전 대통령 자신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16일 구속 연장에 반발해 재판을 ‘정치 보복’으로 규정하고 재판 보이콧을 선언했다. 이후 9개월 넘게 병원 치료 목적 외에는 구치소에서 나오지 않고 있다. 그동안 공식 옥중 메시지 한 건 없었다. 보복에 대한 저항으로 재판을 거부하고 소통을 차단해버린 것이다.

결과는 실패다. 저항은 그 대상이 부담을 느껴야만 의미가 있다. 박 전 대통령의 수감 자체가, 또 그의 측근과 지지자들의 동향이 여권에 짐으로 느껴져야 저항일 텐데 그렇지 않다. ‘특활비 사건’ 선고에 청와대와 여당은 별 반응이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홀가분하게 느끼는 분위기다. 박 전 대통령은 잊혀지고 있다.

만약 그가 목표를 ‘망각’으로 바꾸고 정치를 깨끗이 접겠다면 더 말할 게 없다. 그게 아니라면 의미 없는 저항은 중단하고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의 최측근 정 전 비서관이 억울해도 겸허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듯이 말이다.
 
이명건 사회부장 gun43@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