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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 칼럼]평형감각 상실한 대한민국

입력 | 2018-07-25 03:00:00

극단으로 치닫는 페미니즘, 급과속 좌충우돌 최저임금
뭐든 끝장 보려는 한국 사회
좋은 의도가 때론 덫이 된다… 적당한 선에서 멈출 줄도 알아야




고미석 논설위원

숫자를 잘못 봤나? 거실 온도계의 눈금이 34도로 올라갔다. 햇살 가득한 방은 무려 37도! 바닥이 뜨끈뜨끈하다. 에어컨 바람이 싫지만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지난 주말 처음 에어컨을 켰다. 순식간에 땀은 식었지만 이내 꺼버렸다. 방문 열고 나가면 아까와는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숨 막히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강제 냉각장치에 익숙해진 몸이 실내온도를 견디지 못하게 변한 것이다. 다시 부채와 선풍기로 돌아가니 답답하긴 해도 차츰 체온이 기온에 적응해 가는 듯했다. 어릴 적 선풍기가 처음 집에 들어왔던 때가 문득 떠올랐다.

올여름 더위는 저 편하자고 마구 생태계를 망가뜨린 인간에 대한 보복인지 예사롭지 않다. 극성맞은 인간과 자연의 충돌인가. 극단으로 흐르는 자연현상은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 현상과 앞뒤 한 쌍인지도 모른다. 인간 스스로 원인 제공자가 된 논란들로 한국 사회는 더운 공기를 한층 뜨겁게 달구고 있으니 말이다.

이루 다 열거하기도 더운 노릇이지만, 급진적 페미니즘을 둘러싼 설왕설래도 그중 하나다. 강남역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을 계기로 여성주의 활동에 대한 공감대가 모처럼 확산됐으나 웬걸. 남성 혐오, 여성 우월주의를 표방한 사이트들이 의기양양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상황이 급반전됐다. 그들 잣대에 안 맞는 것은 죄다 공격 대상으로 삼아 대중을 기겁하게 만든 것이다. 극소수 과격파의 행태가 평형감각을 유지해온 건전한 페미니즘 활동에 되레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짜증지수를 높이는 데는 정부도 빠지지 않는다. 근로시간 단축부터 내년도 최저임금 두 자릿수 인상까지 속도전 일로매진이다. 노동 존중의 목표를 완수하려면 규정 속도를 지키는 것이 관건일 텐데 가속 페달에서 발도 떼지 않고 곡예운전을 하는 듯하다. 성과를 향한 과욕이 과속을 부르는 중일 게다.

좋은 의도가 때로 덫이 된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영세 자영업자 4명 중 3명이 내년 최저임금을 감내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도를 넘은 정책이라고 현장에서 아우성쳐도 쇠귀에 경 읽기다. 소상공인생존권운동연대가 어제 출범하면서 불복종 운동을 본격화할 태세다. 적폐청산 이름의 인적 청산 역시 2명의 전직 대통령이 갇힌 상황에서도 구실 될 만한 새 이슈를 재생산해 가며 기세등등하다.

사회 곳곳에서 평형감각이 무너질 조짐이 보인다. 롤러코스터 사회로 변하기 전에 국정 운영에서 ‘적당함’의 중요성을 재인식해볼 필요가 있겠다. 흥미롭게도 스웨덴의 라이프스타일로 ‘적당한’ ‘충분한’을 일컫는 ‘라곰’은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우리말의 ‘적당함’은 부정적 어감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원래 적당하다는 것은 도덕적 태만과 무사안일이란 뜻이 아니다. 어떤 상태가 과부족 없이 목적에 딱 들어맞는다는 의미다.

일본 그래픽디자이너 사토 다쿠의 책 ‘삶을 읽는 사고’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그가 추구하는 ‘적당히’는 ‘완벽하게 할 수도 있지만 일부러 바로 그 전 단계에서 멈추고 종결한다’는 뜻이란다. 과하지 않게, 적절한 지점에서 멈추는 여유야말로 소중한 가치라는 풀이다.

능력과 의지가 있지만 ‘전체’와 ‘후일’을 생각해 일정 선에서 멈추는 것과, 무능과 불순한 의도로 무언가를 하는 척 어영부영 둘러대는 것은 다르다. 좋은 의미의 적당함은 도덕적 성질과 유사한 특징을 갖는다. 딱 알맞게, 적당한 선을 넘지 않는 일은 막 가는 것보다 쉽지 않다. 하지만 유익하다. 어떻게 해도 박수치는 견고한 지지층이 있는데 왜 절제와 평형에 신경 써야 하는가? 방향을 잘못 잡고 급히 달려가 봤자 목표 지점과 한참 다른 엉뚱한 곳에 이르기 때문이다.

정치도 사회도 끝장을 보려는 듯한 시대다. 에어컨을 최대치로 돌려 폭염에 맞서겠다는 풍경처럼. 에어컨을 과도하게 쐬면 몸이 체온 조절 기능을 상실하고 평형감각을 잃어간다고 한다. 흔들리는 나라에 평형을 잡아주는 것은 세금으로 국록 받는 사람들의 도리일 것이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적당’을 동양적인 생활방식의 지혜라고 들려준다. 그의 책 ‘보자기 인문학’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옛날 중국인들이 이상으로 삼은 정사(政事)란 네모난 그릇에 담은 죽을 둥근 국자로 뜨듯 나아가는 것이라고. 아무리 빈틈없이 하려 해도 구석에 남겨지는 것이 있다. 이를 아는 것이 나라를 다스리고 삶을 살아가는 여유이자 풍미일 게다. 더위는 때가 되면 평상을 되찾을 것이다. 더위 먹은 나라는 언제 평형을 찾게 될까.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