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르포]
영천=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 65분 만에 바싹 익은 삼겹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자동차 보닛 위에서 베이컨처럼 익고 있는 삼겹살. 영천=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24일 40.3도에 이어 25일에도 전국 최고기온인 39.3도의 불볕더위를 나타낸 경북 영천 신녕면에서 본보 조건희 기자가 비닐랩을 깔고 자동차 보닛 위에 올려놓았던 삼겹살을 먹고 있다. 뜨거운 햇볕에 달궈진 보닛 온도는 70도에 달해 불없이 65분 만에 삼겹살이 익었다. 영천=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20분이 흘렀을 때 타이머 대용으로 보닛에 올려둔 휴대전화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기기의 온도가 높아 실행 중인 앱을 종료합니다’란 메시지가 떴다. 황급히 휴대전화를 옮겼다. 목이 타 그늘에 둔 물컵을 흔들어보니 30분 전만 해도 가득했던 얼음이 다 녹아 없어졌다.
2시간 만에 반숙으로 익어버린 계란. 영천=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 “구십 평생 이런 더위 처음”
오후 4시경 신녕면 부녀 경로회관을 찾았다. 에어컨 바람을 쐬기 위해 모인 할머니 9명 중 4명이 찬물을 담은 물통을 벤 채 낮잠을 자고 있었다. ‘물통 베개’는 열이 오르는 목과 얼굴을 식히기 위한 ‘필수 아이템’이다. 한 할머니가 경로회관 미닫이문을 꼭 닫지 않자 다른 할머니가 “문! 문!”이라고 외쳤다. 순식간에 바깥열기가 밀려들 수 있어서다.
신녕면 주민 3970명(주민등록 기준) 중 38.2%인 1516명이 65세 이상 고령자다. 초고령 사회의 기준인 노인 비율 20%를 훌쩍 뛰어넘는다. 신녕면에서 나고 자랐다는 80, 90대 어르신들은 “평생 이렇게 독한 더위는 처음”이라고 입을 모았다. 이호수 할아버지(91)는 “숨이 턱 막힌다. 이러다 노인들이 큰일을 치를까 걱정된다”고 말했다.
신녕초교 전교생 84명 중 운동장에 나와 있는 어린이는 한 명도 없었다. 폭염경보가 발효돼 체육수업 등 야외활동이 중단됐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쉬는 시간에도 밖으로 나오지 않고 현관이나 계단에 둘러앉아 수다를 떨었다. 정호엽 신녕초교 교감은 “자칫 학생들이 열사병에 걸릴까봐 최근 교실 온도를 권고 기준(26~28도)보다 낮춰 관리하고 있다”고 말했다.
● 대프리카 열기 흘러와 갇히는 ‘더위 저수지’
신녕면은 남서쪽으로 팔공산(해발 1192m), 북쪽으로 보현산(1124m)과 아미산(737m)에 둘러싸인 협곡 지형이다. 그 너머로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이 있다.
산에 파묻힌 지형은 신녕면을 대한민국 최고 ‘핫(Hot) 플레이스’로 만든 주요 원인이다. 호남지방에서 달궈진 남서풍은 산을 넘어오면서 더 뜨거워져 이곳에 이른다. 남동쪽 방향엔 유일하게 산이 없지만 이곳은 숨구멍이 아니다. 오히려 대프리카(대구+아프리카)로 불리는 대구의 뜨거운 공기가 협곡을 타고 흘러들어오는 입구다. 영천시와 함께 최고기온 전국 상위권인 경산시도 그 길목에 있다. 신녕면은 사방에서 모인 열기가 그대로 갇히는 ‘더위 저수지’인 셈이다.
전재목 대구기상지청 관측예보과장은 “이대로라면 경북 지역에서 올여름 최고기온 기록(40.3도)을 경신할 수 있다”며 “노인과 어린이 등 폭염 취약대상은 열사병 등 온열질환과 일광화상을 피하려면 물을 자주 마시고 외출을 삼가는 게 좋다”라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