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밤에 택시를 탄 여성은 홀로 스릴러 영화를 찍는다. 남자 운전사가 평소 가던 길로 안 가면 심장이 쿵쾅거린다. 도망쳐야 할 것 같아 신호 정지 때마다 택시 문고리를 잡았다 놓는다. 귀갓길 낯선 남자가 뒤따라오는 느낌이 들 때면 휴대전화를 보는 척 걸음을 멈춘다. 남자가 지나가야 다시 발걸음을 뗀다.
엘리베이터에 남자와 단둘이 탔을 땐 얼어붙는다. 남자가 내리기 전까지 집 층수를 누르지 못해 안절부절못하는 사이 ‘타지 말걸’ 후회가 밀려온다. 치킨 주문도 용기가 필요하다. 배달원 도착 전 집 현관에 남자 신발을 갖다놓는다. 여자 혼자 산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 아예 1층으로 내려가 받는 날도 있다. 따끈따끈한 치킨을 베어 물면서도 신경이 쓰인다. 주문할 때 남겨진 휴대전화 번호로 이상한 문자가 날아들진 않을까.
이 오랜 관성을 더는 못 참는다는 울분이 최근 혜화역 시위에 여성 6만 명(주최 측 추산)을 불러 모았다. 안전에 관해서도 남녀가 ‘기울어진 운동장’에 있다는 자각은 1020 ‘영(Young)페미니즘’의 눈에 띄는 특징이다. 딱딱한 담론이 아닌 당장의 절실한 일상 문제다. 폭발력이 셀 수밖에 없다.
‘한남충(한국남자 벌레)’ 같은 남성 혐오 표현에는 적대감 못지않게 절박감이 엿보인다. 여성들의 날 선 언어에는 위협적인 존재를 향해 강하게 말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공포로부터 잠시나마 해방되고 싶은 간절함이 배어 있다. 혜화역 시위는 각자 짊어져 온 두려움을 결집해 자신감으로 바꾸는 장이었다.
천주교 성체 훼손, 남성 누드 사진 유출 등 워마드의 극단적 행태 이면에는 다른 가치관이 설 자리가 없을 만큼 강력한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때문에 예수도, 어린이도, 난민도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경계한다. 피해의식으로 보일 수 있지만 여자로 살아보지 않은 남성들이 피해와 피해의식의 경계를 섣불리 재단할 수는 없다.
얼마 전 법정에서 난민을 돕는 20대 여성 통역사를 본 적이 있다. ‘난민 불인정 처분이 잘못됐다’며 무슬림 남성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판사에게 전하던 그의 표정은 간절해 보였다. 그런데 통역사는 재판 뒤에도 한참 동안 텅 빈 방청석에 혼자 있었다. 자신이 통역했던 난민들이 모두 법원 밖으로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남자인 난민들이 “물어볼 게 있다”며 다짜고짜 연락처를 달라고 조르거나 무작정 뒤따라오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다. 공포는 그 어떤 대의명분보다 절실하다.
다만 갈수록 격렬해지는 ‘남혐’ 움직임이 우려된다. 혐오는 껍데기만 거칠 뿐 상대가 귀를 닫으면 그만이다. 남성에게 위협이 되지 않으니 역설적으로 온건한 투쟁이다. 오히려 남성들을 분열시켜 포섭하는 게 위력적일 수 있다. 남성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여성인 경우가 많다. 공감 세포를 자극할 약한 고리가 적지 않다. ‘너희도 우리와 똑같이 당해보라’는 겁박보다 ‘이러면 아프지 않겠느냐’는 설득 앞에서 ‘한남충’은 더 초라해진다.
신광영 사회부 사건팀장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