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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전에 연금 타고 싶다” 거리 나선 러시아인들

입력 | 2018-07-30 03:00:00

‘정년 60→65세’ 연금법 개정안에… “평균수명 66세인데” 강력 반발
중장년-지방노동자 중심 시위… 공산당-친정부 단체들까지 가세
BBC “푸틴, 가장 위험한 개혁 진행”





“우리도 직장에서 죽지 않고, 연금 받으며 살고 싶다.”
28일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시민 1만2000여 명이 “우리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한다”는 피켓을 들고 거리로 뛰쳐나왔다. 모스크바뿐 아니라 예카테린부르크, 로스토프나도누, 볼고그라드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정부의 연금법 개정에 반대하는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졌다.

러시아는 고령화에 따른 연금 기금 적자와 노동력 감소를 보완하기 위해 내년부터 시작해 2028년까지 남성 정년을 60세에서 65세로, 여성 정년을 2034년까지 55세에서 63세로 단계적으로 늘리는 연금법 개정안을 지난달 발표했다. 이 개정안은 논란 끝에 하원 1차 투표에서 통과됐다.

그러나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러시아 남성의 기대수명은 66세에 불과하다. 취약한 건강관리와 독주를 마시는 음주 습관 탓이다. 평균 기대수명이 66세인데 65세까지 일하라고 하자 남성들이 거리로 뛰쳐나왔다. 예카테린부르크 시위에 참석한 콘스탄틴 주코프 씨는 “모두가 우리 러시아인들의 수명을 알고 있지 않느냐. 내가 연금을 받을 만큼 살 수 없다면 왜 보험료를 내야 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각종 여론조사 기관에 따르면 국민 80% 이상이 연금법 개정안에 반대하고 있다. BBC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20년 통치 기간 중 가장 위험한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푸틴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락하고 있다. 성공적인 월드컵 개최에도 불구하고 7월 초 여론조사에 따르면 재선거가 치러질 경우 49%만이 푸틴 대통령에게 다시 투표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4년여 만의 최저 수준으로 한 달 전보다 13%포인트 급락했다.

연금법 개정에 가장 반발하는 건 푸틴 대통령의 전통적인 지지 계층인 중장년, 지방 노동자들이다. 연금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당장 내년부터 1500만 명의 연금액이 줄어든다. 러시아는 다른 국가와 비교해 중장년 임금이 낮아 연금 의존도가 높다. 유럽 대부분 국가의 임금 구조가 20대부터 50대까지 꾸준히 올라가다가 이후 약간 꺾이는 추세라면, 러시아는 30대 초반에 임금의 최고점을 찍은 뒤 계속 떨어져 60∼64세 임금은 25∼29세 평균 임금의 80%밖에 받지 못한다.

러시아 정부는 월드컵 열기에 묻히기를 바라며 연금 개혁안을 월드컵 개막 전날인 지난달 13일 발표했지만 국민들의 반발은 심상치가 않다. 1일에도 45개 도시에서 동시에 개정안 반대 시위가 열렸다.

과거의 반정부 시위가 알렉세이 나발니를 중심으로 한 일부 젊은 활동가 위주로 이뤄졌다면 지금의 연금법 개정 반대 시위에는 어용 노조와 야당의 비판을 받았던 단체 및 정당들까지 합세하고 있다. 28일 시위도 공산당과 무역 노조가 중심이었다. 덩달아 러시아 지도층의 부패를 지적해 온 나발니의 주장도 힘을 받고 있다. 시위 현장에는 “우리 석유는 다 어디로 갔느냐”는 피켓도 등장했다. 모스크바 시위에 참석한 세르게이 우달초프 씨는 “은퇴 연령이 높아진다면 러시아 시민들은 100만 루블(약 1780만 원) 이상을 도둑맞는 것과 같다”며 “국민투표를 허락하지 않는다면 수백만 명이 거리로 나서 두마(하원) 해체와 대통령 탄핵까지 추진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푸틴 대통령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연금법 개정안 발표 이후 한 달 넘게 침묵하던 푸틴 대통령은 20일 “향후 10년 정도는 연금을 차질 없이 지급할 수 있지만 이후 미래를 대비하기 시작해야 한다”면서도 “지금까지 나온 대안은 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 모든 의견과 모든 관점을 듣고 싶다”며 한발 뺐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