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달 19일 경기 성남시 분당서울대병원에서 열린 ‘의료기기 분야 규제혁신 및 산업육성 방안 발표’ 행사에서 소아당뇨병을 앓고 있는 정소명 군(가운데)과 정 군의 어머니 김미영 씨를 격려하고 있다. 성남=청와대사진기자단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김 씨는 아들이 피를 뽑지 않고 혈당을 측정할 수 있도록 연속혈당측정기를 2015년 외국에서 직접 구입해 사용해왔다. 엔지니어 출신인 그는 해외 당뇨병 커뮤니티(Nightscout)가 공개한 프로그램 소스를 활용해 언제 어디서나 아이의 혈당을 쉽게 체크할 수 있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을 만들었다.
김 씨의 경험이 널리 알려지자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다른 소아당뇨병 환우들의 요청이 쇄도했다. 이에 김 씨는 이들에게 연속혈당측정기를 배송해주고 원격 모니터링 시스템을 소개했다. 이게 그가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의료기기법 위반으로 고발당한 이유다. 다행히 사법당국은 김 씨의 상황을 참작해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김 씨의 사례가 문 대통령이 말하는 의료기기 규제개혁과 맞닿아 있는지를 두고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사실은 기존 치료법을 넘어선 보다 고도화된 치료법이 절실한 환자들이 무척 많다는 점이다. 시시각각 혈당 변화의 위협에 노출된 아이를 둔 부모가 언제 어디서나 아이의 혈당을 체크하려 하는 건 인지상정이다.
미국 일본 호주 등 선진국에선 소아당뇨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치료를 위한 스마트폰 앱 개발이 활발하다. 하지만 국내에선 의료민영화, 대기업 배불리기, 대형병원 쏠림현상 심화 등을 우려한 반대 논리로 10년 넘게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
원격의료에 발목 잡힌 국내 의료기기가 해외에서 각광받는 일은 더 이상 뉴스가 아니다. 국내의 한 업체는 자녀의 귓속, 콧속 상태 등을 간편하게 촬영할 수 있는 체온기 크기의 의료기기를 상용화했다. 영상을 찍어 의료진에게 보내면 바로 환자 상태를 알 수 있도록 개발한 스마트한 의료기기다. 미국이나 중국, 필리핀 등 원격의료가 가능한 외국에선 불티나게 팔리지만 국내에선 사용불가다. 중국 최대 전자상거래 기업인 알리바바가 혁신 기기라며 상까지 줬는데 말이다.
KT는 원격진료 시스템 플랫폼을 만들어 러시아, 카자흐스탄 등에 사는 환자와 국내 병원을 연결하는 원격의료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KT 관계자는 “예전에는 덩치가 큰 의료기기를 이용해야 해 원격진료가 쉽지 않았지만 요즘은 모바일로 환자 정보를 모두 병원에 보낼 수 있어 환자와 병원의 만족도가 매우 높다”고 말했다.
이렇게 모두가 좋은 일을 정부가 못 하게 한다. 유사 시 부정맥 환자의 심박동을 바로잡는 이식형 의료기기만 해도 그렇다. 이 기기는 24시간 환자의 심박동 정보를 읽어 저장한다. 이 정보를 전문의가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만약 위험신호가 감지되면 전문의는 즉시 환자에게 내원을 권고한다. 환자는 불필요하게 병원을 찾을 필요가 없다. 언제든 자신의 심박동을 전문의가 체크할 수 있으니 해외출장을 가거나 이동할 때도 마음이 놓인다.
새롭고 혁신적인 기술이 모든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니다. 더욱이 한국의 의료시스템은 어느 선진국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잘 갖춰져 있다. 의사를 직접 만나 진료를 받더라도 의료보험 혜택으로 병원비가 저렴해 원격의료 시스템이 불필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환자의 상황에 따라 원격치료와 같은 새로운 접근법이 필요하다면 사용 기회 자체를 차단해선 안 된다. 김 씨처럼 자신에게 꼭 필요한 시스템을 외국에서 들여온 게 범죄라면 문 대통령의 말마따나 도대체 누구를 위한 규제란 말인가. 의료계의 규제개혁은 바로 환자의 불편을 해소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이진한 의학전문기자·의사 liked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