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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세계 순회전 맡은 토종 큐레이터

입력 | 2018-08-02 03:00:00

동양인 첫 英 테이트 입성 이숙경씨
“내년 세계 5개 미술관서 전시, 각국 젊은 관객들 어떻게 볼지 궁금
한국미술 잘 알아야 해외활동 도움”




영국 테이트 미술관에서 아시아태평양지역 작품 구입위원회와 아시아 리서치센터를 총괄하고 있는 이숙경 큐레이터. 테이트 미술관 제공

연간 500만 명이 찾는 테이트모던을 비롯해 영국 전역 4개 공공 갤러리를 갖고 있는 ‘테이트’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술관이다. 이숙경 테이트 시니어 큐레이터(49)는 2007년 보수적 영국의 언어·문화 장벽을 뛰어 넘고 이곳의 동양인 최초 큐레이터가 됐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최연소 학예사이기도 했던 그는 학예사가 되기 전 해외 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국내파’. 그를 국제적 큐레이터로 이끈 것은 학문적 호기심과 새로운 경력을 위한 절실함이었다.

현재는 의 전시 개발, 연구 플랫폼인 ‘리서치 센터: 아시아’와 아시아·태평양 지역 작품 구입 위원회를 총괄하는 중책을 맡고 있는 이 큐레이터를 최근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의 카페에서 만났다.


●고유 분야로 해외 개척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공개 채용으로 학예사가 됐을 땐 저도 아는 것이 많지 않았어요. 예술학을 전공했지만 현장 경험은 없어 일을 하면서 배웠죠.”

그는 ‘시험을 잘 봐서 큐레이터가 됐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홍익대 대학원을 다니던 중인 26살에 학예사가 되어 일을 시작했고, ‘러닝 온 더 잡(learning on the job)’이라고 그 시절을 설명했다. 그리고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다양한 분야를 포괄하는 국내 교육이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전문화된 영국과 달리 한국은 학사 과정에서 다양한 미술사를 배웁니다. 또 유럽 대륙 철학, 후기 구조주의, 페미니즘 등 학문으로 기초 지식을 쌓을 수 있었어요.”
국내 교육의 장단점이 있었지만, 한국 미술사를 좀 더 열심히 했으면 하는 아쉬움만은 분명하다.

“한국 미술사는 한국어와 문화를 아는 사람이 해야 충실해지기 때문입니다. 제가 후학들에게 늘 한국 미술사를 전문으로 하라고 조언하는 이유에요.”

그런 이 큐레이터가 영국에 오게 된 건 1998년. 사치 갤러리가 조명한 영국의 젊은 현대 예술가인 yBa(젊은 영국 예술가들·Young British Artists) 전시를 기획하면서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연수 프로그램으로 영국에 왔고, 그 때가 학예사 경력 4년 반 남짓했을 시절. 경력을 좀 더 개발하고 싶은 마음에 영국 에섹스대에서 박사 과정을 새롭게 시작했다.

그가 정착했을 당시 영국은 yBa가 조명을 받고, 현대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때였다.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한국의 미술 잡지에 기고하고, 독립 큐레이터 활동도 하며 꾸준히 경력을 쌓았다. 2000년 런던에 현대미술관인 테이트 모던이 생기면서 미술계 지형이 바뀌고 있을 시절이다. 박사 과정을 마친 뒤인 2007년, 테이트 리버풀에서 큐레이터로 일을 시작했고 그 때도 백남준 회고전을 기획했다.

이 큐레이터처럼 해외 취업을 꿈꾸는 젊은이가 많다고 하자 그는 외국 활동이 목적이 아닌, 자신만의 분야를 갖춰야 한다고 조언했다. “저는 세계 미술에 관심이 많아 영국에서 일하게 됐어요. 미술을 대중에게 보일 방법을 고민하는 테이트의 공공성도 저와 잘 맞았습니다. 그러나 저처럼 미술관이 아닌 상업 갤러리나 옥션에서 일할 수도 있어요. 자신의 본성을 파악하고 선도할 수 있는 분야를 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미래가 지금이다

백남준 TV 정원

이 큐레이터는 내년 10월 17일 개막하는 대규모 회고전 ‘백남준: 미래가 지금이다(Nam June Paik: The Future is Now)’전을 맡고 있다. 2012년부터 연구를 시작한 전시는 ‘이모지’를 연상케 하는 픽토그램 등 인터넷 시대를 예견한 백남준(1932~2006)의 선구자적 성격을 조명한다.
“백남준은 일본 독일 미국 그리고 한국 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고, 전위성을 폭발시킨 작가입니다. 그의 세계적 궤적을 보여주기 위해 테이트모던을 포함해 유럽, 미주, 아시아 투어로 5개 미술관에서 선보일 예정이에요.”

테이트 리버풀에서 처음 백남준 회고전을 열었을 때는 일반인이 잘 모르는 작가인만큼 대중적인 부분에 초점을 뒀다. 그러나 이번 전시는 기술의 발전이나 20세기 문화 변화에 대해 갖고 있던 작가의 비전을 좀 더 깊이 파고들 예정이다.

“전시가 순회하면서 결국엔 그의 작품이 자신이 영향을 끼쳤던 지역을 또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 만남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 지도 재미있는 포인트죠. 특히 온라인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백남준을 어떻게 볼 것인지 저도 무척 궁금합니다.”

그는 테이트모던 전시가 열릴 때 덴마크 작가 올라퍼 엘리아슨의 개인전도 열리기 때문에 기술을 활용한 과거와 현재의 두 작가를 비교해보라고 귀띔했다.


●‘세계미술’ 꿈꾸는 테이트

이 큐레이터는 백남준 전시뿐 아니라 리서치 센터의 시니어 큐레이터로서 테이트미술관의 미술사와 큐레이팅의 새로운 방법 연구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국경과 지역을 뛰어 넘는 국제적 미술에 오래전부터 관심을 가져온 결과다.

“지금까지 미술사의 서술은 서유럽과 북미 중심이에요. 그런데 미술사는 다른 곳에서도 일어났죠. 일본의 구타이라던가 라틴아메리카의 네오콘크레테 같은 다양한 움직임이 있었어요. 그럼에도 굉장히 많은 것들이 미술사에서 제외된 것이잖아요.”

최근 테이트미술관 역시 기존의 서유럽, 북미 중심의 미술사 개념 언급을 줄이고 있는 추세다. 12년 간 준비 끝에 2016년 테이트모던의 상징이었던 화력발전소 건물 옆에 새로 문을 연 블라바트닉 빌딩은 이런 테이트의 새로운 방향성을 보여준다. 올해 초는 러시아 설치작가인 카바코프 부부, 최근에는 미국의 여성 작가인 조안 조나스를 조명했다. 20세기 미술사에서 제외된 여성, 비서구 거장의 전시가 꾸준히 열리는 셈이다.

“전시를 잘 살펴보면 미니멀리즘, 포비즘이라는 규정적 단어 사용을 지양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지금까지의 미술사를 원점에서 되돌아보면서, 글로벌한 미술사를 다시 쓰는 작업을 테이트가 앞서서 해보겠다는 것이 제가 요즘 하는 연구의 요지입니다.”

그가 일하는 리서치 센터는 2012년 미국 앤드류 멜론 재단의 후원으로 설립됐다. 이 큐레이터는 이 때 리서치센터에 합류하면서 백남준에 대한 연구도 시작했다. 특히 아시아 파트를 담당, 체계적인 소장품 구입과 전시 프로그램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아시아·태평양 구입위원회에서는 아시아와 호주 대륙을 포함한 지역의 예술 작품 구입 전략을 지속적으로 정비하고 있다.

“내년 초에 리서치센터에서 준비하는 프로젝트를 공개할 예정입니다. 대대적인 론칭 행사가 있을 것이고 장소는 런던이 아닐 수도 있어요. 아직은 논의 중인 단계이지만 방법론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으니 기대해도 좋을 겁니다.”

김민기자 kimm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