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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개국과 회담한 北, 한국은 ‘패싱’… 꼬이는 비핵화 중재외교

입력 | 2018-08-06 03:00:00

강경화-리용호 ‘ARF 회담’ 불발




싱가포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의 회담을 고대했던 강경화 외교부 장관이 5일 빈손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강 장관은 6월 취임 1주년 간담회 때부터 11년 만의 남북 외교장관 회담 성사에 강한 의지를 밝혔지만 리 외무상의 거절로 짧은 회동에 만족해야 했다. 북한이 참여하는 유일한 다자협의체인 ARF에서 비핵화 중재 역할을 자임한 한국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면서 외교적 한계를 노출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 11개국 만나면서 ‘코리아 패싱’한 北

강 장관은 5일 싱가포르에서 가진 결산 브리핑에서 남북 회담 무산에 대한 아쉬움을 표했다. 다양한 외교채널을 통해 타진했지만 3일 ARF 환영만찬장에서 조우한 리 외무상이 우리 측의 대화 의지에 ‘아직 응할 입장이 아니다’라고 밝혔다는 점도 소개했다. 강 장관은 “충분히 그 뜻을 존중해 드려야 할 것 같다”면서 “진솔한 분위기에서 한반도 정세 진전 동향과 향후 협력 방향에 대해 짧지만 허심탄회하게 생각을 교환했다. 언젠가는 남북 외교당국이 서로 협의의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리 외무상의 태도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공동성명 이행에 임하는 북한의 폐쇄적인 소통 기조를 엿볼 수 있다. 북-미 교착상태가 이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북한이 굳이 한국을 따로 만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반면 북한은 한국을 제외하고 11개 나라와 전례 없이 활발한 양자 외교장관 회담을 펼쳤다. 3일 싱가포르에 도착한 리 외무상 및 북측 대표단이 ARF를 계기로 이틀 동안 회담을 가진 곳은 중국, 인도네시아, 태국, 인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미얀마, 필리핀, 유럽연합(EU), 뉴질랜드 등이다. 이들 중 대다수는 북한이 ARF에 앞서 먼저 회담을 갖자고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북한이 ARF 폐막 후 양자 공식 방문으로 싱가포르에 이어 6일 이란까지 찾을 것으로 알려지면서 제재 완화 또는 체제 보장에 대한 지지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광폭 행보를 펼칠 것으로 보인다.

○ 북-중과 종전선언 주파수 맞추려고 한 한국

북한의 ‘코리아 패싱’에도 정부는 종전선언의 필요성을 부각하며 북한이 요구하는 동시적 비핵화 조치에 결과적으로 힘을 실었다. 강 장관은 “북한만이 일방적으로 비핵화를 하는 게 아니라 북한이 원하는 평화체제, 안전보장 차원에서도 논의가 함께 이뤄질 것”이라며 비핵화와 함께 종전선언이 필요하다고 워싱턴을 압박하고 있는 북한, 중국과 주파수를 맞췄다. 정부 당국자들은 “종전선언을 동시 논의한다고 미국이 주도하는 대북제재 이행을 소홀히 하겠다는 의미는 아니다”고 했지만, 정작 ARF에서 미국과도 비핵화 이슈를 놓고 별다른 진전 없이 원칙론만 재확인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이런 상황에 대해 청와대는 “북-미 간 쟁점이 분명하게 드러났다”며 ARF에서 벌어진 북-미의 치열한 신경전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기대를 내비쳤다. 종전선언과 대북제재를 놓고 북-미 간 전선(戰線)이 명확해졌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친서 교환으로 대화 의지는 재확인된 만큼 양측 간 외교적 해결 노력이 본격화될 계기가 마련됐다는 논리다. 종전선언을 요구하는 북한과, 종전선언에 앞서 비핵화 신고 단계 이행이 필요하다는 미국이 대치를 거듭하고 있는 만큼 2차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정치적 해법’을 모색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하지만 1차 정상회담 이후 비핵화 프로세스에 별 진전이 없는 상황에서 트럼프와 김정은이 다시 만나 북한의 핵무기 및 핵시설 신고 등 가시적 성과를 도출하지 못한다면 종전선언 채택을 위한 남북미 3자 또는 남북미중 4자 정상회담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는 지적도 많다. 문재인 대통령의 가을 평양 방문 역시 북-미 대화에 영향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관계자는 “남북 정상회담은 이번 ARF 이후 북-미가 어떤 구상을 갖느냐에 따라 시기나 의제가 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싱가포르=신나리 journari@donga.com / 문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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