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에서 악수를 나누고 있는 강경화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리용호 북한 외무상. 사진=외교부 제공
동아일보 기사 검색 시스템에 CVID(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핵의 폐기) 용어를 검색 해보니 2004년 1월 4일자 기사가 처음이었습니다. 본보 기자가 미국의 대북정책과 관련한 신년 시리즈 취재차 백악관을 방문했을 때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국가안보회의 당국자는 “대북정책의 최종목표와 대북 인센티브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완전하고 검증가능하고 돌이킬 수 없는 핵 폐기다. 북한이 이를 실행하면 북한의 우려를 해소할 ‘가능성’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부시 행정부는 2003년 1월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자 자신들의 대북정책이 전임 빌 클린턴 행정부와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며 이 용어를 만들어 낸 것으로 전해집니다. 미국 측은 6자회담 과정에서 이를 공식 제기했습니다. 2004년 2월 25일부터 28일까지 열린 제2차 회담에서 북한이 CVID 원칙을 받아들이라고 압박한 것입니다. 하지만 북한 측은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미국도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방식으로’ 제재 해제와 북미관계 정상화, 평화협정 체결, 한반도 비핵지대화 등과 같은 구체적인 행동을 보장하라면서 ‘북한판 CVID’를 들고 나왔습니다(송민순 전 외교통상부장관의 ‘빙하는 움직인다’ 92쪽).
당시 노무현 정부도 회담의 진전을 위해 CVID를 다른 표현으로 대체하자고 미국 정부에 제안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동아일보 2004년 5월 24일자에 따르면 정부 관계자는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CVID란 용어 자체에 집착하기보다는 그 내용을 현실적으로 실현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해 미국 측에 이런 의견을 전달했다”고 말했습니다. 다음날 동아일보에 따르면, 북한은 “CVID 용어를 사용하는 한 협상에 진전은 없을 것”이라고 참여국들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중국과 러시아도 한미일에 “북한에 대한 ‘문턱’을 낮춰 달라”고 요구했고, 이에 한국 정부가 호응한 것입니다.
하지만 6자회담의 진전을 원했던 부시 행정부도 결국 한 발짝 물러섰습니다. 2005년 7월 26일 5차 회담 개막사에서 당시 미국 측 수석대표인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차관보는 CVID 대신에 북한이 ‘영구적이고 충분히, 그리고 검증가능하게’ 핵을 폐기할 것을 결정하면 북한의 안보우려와 에너지 관련 요구를 논의할 준비가 있다고 발언했습니다. 결국 2005년 9·19공동성명에는 CVID라는 표현이 ‘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라고 축소돼 겨우 들어갔습니다. 북한의 외교력이 승리한 것입니다.
6일 발표된 싱가포르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의장 성명에서 지난해 들어갔던 CVID가 빠지고 완전한 비핵화(CD)라는 반쪽도 안 되는 표현이 들어갔습니다. 북한은 지난해 핵무력 완성국면에서 어쩔 수 없이 뒤집어썼던 CVID의 멍에를 벗어 던진 것입니다. 그동안 북한이 참석한 가운데 아시아 이웃 국가들이 역내 현안을 논의한 결과를 반영한 ARF의 의장성명은 북한에 강력한 또래압박(peer pressure)으로 기능해 왔습니다. 역시 북한의 외교적 승리라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미 한미 양국은 4·27판문점 정상회담과 6·12싱가포르 북미정상회담 선언문에 CVID를 관철하지 못하고 CD로 물러선 상태였습니다. 이번 ARF회담에서 정부는 CVID 표현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하면서 이보다는 4·27판문점 정상선언문에 들어가고 6·12싱가포르 정상 공동 성명이 인용한 CD 표현이 들어가는 것을 더 선호한다고 공개적으로 밝히는 해프닝을 연출하기도 했습니다.
전문가들은 2006년 10월 9일 북한의 1차 핵실험 이후 노무현 정부가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에 처음으로 CVID원칙을 넣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 것에 비추면 지금 상황은 아이러니 하다고 지적합니다. 5일 뒤인 14일 채택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안 1718호는 ‘북한이 핵프로그램과 대량살상무기(WMD)를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되돌릴 수 없는 방식으로 포기(abandon)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한 외교 소식통은 “당시 이 문구를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한 참여국은 한국과 부시 행정부의 미국이었다”고 회고했습니다. 이후 지난해 북한의 6차 핵실험 이후 나온 유엔 안보리 결의안 2397호까지 CVID 표현은 빠지지 않고 들어갔습니다.
신석호 디지털뉴스팀장·북한학 박사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