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등(吾等)은 자(玆)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로 시작되는 기미독립선언서 전문은 육당 최남선이 썼다. 이광수, 홍명희와 함께 신문화의 3대 천재로 불렸던 최남선은 이 글을 쓰고 “일생 동안 학자로 남을 것”을 고집하며 민족대표 서명을 하지 않았지만 선언문을 썼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2년 6개월 동안 복역했다. 그런데 그는 1943년 매일신보에 대동아전쟁의 학병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기고하고 ‘일선융화론(日鮮融和論)’을 써서 친일의 오점을 남긴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마리 퀴리의 글씨에서 보듯이 학자들의 글씨는 작고 매우 규칙적인 것이 특징이다. 작은 글씨는 치밀하고 신중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규칙적인 글씨는 자기 훈련, 집중, 감정과 충동의 억제, 손재주가 있음, 논리적, 냉정함, 완벽주의를 의미한다. 그런데 최남선의 글씨는 매우 크고 호쾌하다. 큰 글씨가 의미하는 것 중에는 열정, 성취 욕구, 확장 지향, 모험심, 진취적 기상, 호방함, 흥취, 적극성, 자존심, 표현 욕구가 강함, 개방적, 사교적, 활동 지향 등이 있다. 하지만 교만, 충동성, 허영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최남선은 글씨에도 멋을 많이 부려서 과시욕이 강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그의 저서나 글을 읽어 보면 유불선(儒彿仙)에 통달한 지식과 현학적인 표현으로 가득하다.
최남선은 광복 후 반민족행위로 재판을 받으면서 ‘자열서(自列書)’를 썼다. 여기에는 “내가 변절한 대목, 즉 왕년에 신변의 핍박한 사정이 지조냐 학식이냐의 양자 중 하나를 골라잡아야 하게 된 때에 대중은 나에게 지조를 붙잡으라 하거늘 나는 그 뜻을 휘뿌리고 학업을 붙잡으면서 다른 것을 버렸다. 대중의 나에 대한 분노가 여기서 시작하며 나오는 것을 내가 잘 알며”라는 내용이 있다. 하지만 그의 변절은 학업이 아니라 부족한 내공 탓이었다. 그의 글씨는 힘이 부족하고 느슨하여 내면이 강하지 못함을 알려준다.
구본진 변호사·필적 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