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미국 오하이오주 델라웨어에서 열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유세에서 지지자들이 1978년 발표된 ‘YMCA’ 노래가 흘러나오자 머리 위로 ‘Y’ 자를 그리며 흥겨워하고 있다. 폭스뉴스 유튜브 영상 캡처
한기재 국제부 기자
백악관은 연설을 기다리는 청중의 지루함을 덜어주기 위해 대통령이 연단에 등장하기 전까지 수십 곡의 노래를 틀어놓는다.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선별하는 것으로 유명한 그만의 플레이리스트다. 엘턴 존과 롤링스톤스의 노래가 주축을 이루는 이 플레이리스트는 2년 전 대선 때부터 그의 유세장에서 흥을 돋우는 역할을 맡아왔다.
그런데 유세장에 울려 퍼지는 그의 애청곡들을 유심히 듣다 보면 어딘가 어색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가사에 집중하다 보면 특히 그렇다. 그의 평소 성향과는 정반대인 데다 유세 분위기와도 전혀 어울리지 않아 ‘갑분싸(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진다)’란 말이 절로 나오게 하는 노래들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이달 4일 오하이오주 유세장에서 흘러나온 ‘위 아 더 월드’가 대표적이다. 1980년대 팝의 전설들이 아프리카 기아 구호자금을 모으자며 발 벗고 나서 만들었던, “세계는 한 가족이니 나눔을 시작하자!”는 노래다. 불과 7개월 전 아프리카 국가를 ‘똥통’이라고 불렀다는 구설에 휘말리고 해외 원조 예산을 대폭 삭감하려다 의회 반발을 샀던 트럼프 대통령과 어울리는 곡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플레이리스트는 그의 별명인 ‘혼란왕’에 걸맞은 ‘혼란한 플레이리스트’에 불과한 걸까. 언제나 그렇듯 트럼프 대통령에 대한 지나친 과소평가는 현명하지 못하다. 가사만을 잣대로 그의 선곡을 비웃다가는 그 속에 숨겨진 ‘향수 자극’이란 핵심적인 선거 전략 키워드를 놓칠 수 있다.
4일 오하이오주 유세에서 재생된 35곡의 노래가 발표된 평균 연도를 계산해 봤더니 ‘1981년’이었다. 1960∼80년대에 발표된 노래들이 전체의 77%(27곡)를 차지했을 정도로 ‘올드’하다. 2000년대 곡은 달랑 두 곡에 불과했다.
‘위 아 더 월드’(1985년)부터 라이어넬 리치의 ‘헬로’(1983년), 그리고 건스앤드로지스의 ‘스위트 차일드 오 마인’(1987년)까지. 괜스레 희망이 넘쳐흘렀던 과거의 한때를 떠오르게 하는 노래들이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라는 문구가 수놓인 빨간 모자의 물결을 파고든다. 이 노래들이 빌보드차트에서 승승장구하던 시절, 철강과 제조업 일자리는 지금보다는 많았고, 미국의 가치를 위협하는 듯한 이민자 수는 월등히 적었으며, 지금은 무역전쟁의 라이벌이 된 중국은 당시 후진국에 불과했다. 추억에 잠겨 말랑해진 이들의 마음이 트럼프 대통령이 연단에 등장해 “미국이 경제적으로 항복하는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 녹아내리는 것이다.
향수를 자극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플레이리스트’가 올해 전국 유세장에서 울려 퍼지는 동안 그의 지지율은 비교적 호조를 보이고 있다. 갤럽 기준으로 지난해 5월 말부터 올해 3월 말까지 지지율 30%대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했지만, 4월 첫 주를 시작으로 4개월 내내 40%대 초반을 유지해 오고 있다. 특히 ‘러스트벨트’(낙후된 공업지대)를 중심으로 한 골수 지지층의 마음만큼은 여전히 꽉 잡고 있음을 증명해 내고 있다.
11월 중간선거가 다가올수록 트럼프 대통령의 ‘플레이리스트’ 볼륨은 높아져만 갈 것이다. 추억의 노래들이 미국민을 언제까지 춤추게 할 수 있을까.
한기재 국제부 기자 recor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