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은 남녀 구분 없이 온 국민이 단결했던 민족운동이었다. 여성으로는 주로 유관순 열사만 기억되지만 17세 나이로 3·1운동에 참여했다 옥중 순국한 동풍신 열사도 있다. 이듬해 이를 재연했다 옥고를 치른 배화여학교 김경화 박양순 성혜자 소은명 안옥자 안희경 등 ‘제2 유관순’도 적지 않았다. 1920년 평남도청에 폭탄을 투척했던 안경신 열사처럼 작고 연약한 몸으로 항일 무장투쟁에도 참여한 ‘무명’의 여성도 많다.
▷독립운동가 남편을 둔 아내의 희생과 의연함은 끈질긴 독립운동의 밑거름이자 무기였다. 신흥무관학교를 세운 우당 이회영 선생의 아내인 이은숙 여사는 양반가 외동딸로 태어났으나 타지에서 독립운동가들을 밥해 먹이고 삯바느질로 군자금을 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쪽지 한 장 남길 수 없었던 당시 독립운동가의 숨결을 세세히 기록한 ‘서간도 시종기’라는 회고록도 썼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아내인 이혜련 지사는 자녀 5명을 홀로 키우다시피 했다. 아내, 엄마로 고달픈 나날이었지만 미국에서 대한여자애국단을 구성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해 조국을 도왔다.
▷1909년 3월 ‘너의 죽음은 너 한 사람 것이 아니라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이다… 수의를 지어 보내니 이 옷을 입고 가거라’며 사형을 앞둔 안중근 의사와의 면회는 끝내 하지 않았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 안 의사 사후에도 임시정부 뒷바라지를 했던 어머니 역시 독립운동가였다. 그럼에도 여성 독립운동은 잊혀진 역사다. 나라 잃은 설움에 가부장제 속박까지 여성의 삶은 이중 삼중으로 가혹했을 터다. 나라는 되찾았지만 이름은 찾지 못한 여성 독립운동가가 많다. 더 늦기 전에 치열했지만 가려진 삶이 온전히 빛을 보기를 바란다.
우경임 논설위원 woohah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