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남자가 간호사셔? 어쩌다 간호사가 되셨어? 난 당연히 의사일 줄 알았지.”
오늘도 제게 증상을 설명하시던 한 환자분께서 실망한 듯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네, 이제 익숙해요. 저는 일주일에도 몇 번씩 이런 말을 듣는 ‘남자 간호사’입니다.
처음 간호대 입시를 준비한다고 했을 때부터 부모님께서 그러셨죠. “간호대를 간다고? 남자가 의사를 해야지 어떻게 간호사를 하냐?” 친구들 중에는 “여자 만나려고 간호대 가는 거 아니냐”며 놀리는 친구도 있었고요. 심지어 제가 지원한 한 간호대 면접에서조차 교수님이 그러시더라고요. “남자가 일반적인 회사를 두고 왜 간호사가 되려고 하죠?”
각 소방서에서 체력과 구조능력이 뛰어난 소방관들만 출전하는 ‘최강 소방관 뽑기 대회’. 6월 열린 올해 대회에는 특별한 참가자가 출전했다. 경기 송탄소방서 김현아 소방교(30·여)다.
무게가 70kg인 마네킹을 옮기고 11층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등 험난한 경기 방식 때문에 최강 소방관 대회는 그간 남자 소방관들만 출전해 왔다. 첫 여성 참가자인 김 소방교는 “키가 177cm로 어릴 때부터 체격과 체력이라면 남자에게 뒤지지 않았다. 11층에서 구조를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남자들과 똑같이 열심히 뛰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출전 뒤 생각하지 못한 주변 반응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대부분 응원을 보냈지만 어떤 사람들은 “여자가 억세다”, “별스럽다”는 반응을 보였다. 성적이 하위권이었다는 기사에는 ‘역시 그렇지’, ‘우리 집 불나면 여자 소방관은 오지 마라’란 댓글도 달렸다. 김 소방교는 “급박한 현장에서는 남녀노소가 따로 없고 현장에 따라 여자 소방관이 더 필요한 순간도 있는데 ‘여자가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한다’는 식의 부정적 반응에 속상했다”고 말했다.
남자 요리사, 여자 전투기 조종사 등 성 고정 관념을 깬 직업인들이 많아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특정 직업들에 편향된 시선을 가지고 있다. 이는 청소년들의 꿈에도 영향을 준다. 최근 교육부가 고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진로 희망을 조사한 결과 남학생이 원하는 직업 1~3위는 교사, 기계공학자 및 연구원, 군인 순으로 나타났다. 반면 여학생은 교사, 간호사, 승무원 순이었다.
여러 세대를 거쳐 이런 인식이 만연하다 보니 ‘독특한’ 직업을 선택한 이들은 성차별적인 언행을 접하기 일쑤다. 서울의 한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남자 교사 이현직 씨(26)는 언젠가부터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자신의 직업을 이야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 씨는 “대학에서 유아교육과를 들어갔다고 하자 친척들조차 ‘남자답지 못하다’며 웃음거리로 삼았다. 군대에서도 ‘남자가 그렇게 할 게 없느냐’며 비웃음을 샀다”고 털어놨다. 교사가 된 뒤에도 불편한 시선은 떠나지 않았다. 최근에는 한 여자아이의 부모로부터 “선생님이 아이 엉덩이를 닦는 게 불쾌하다”는 취지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 씨는 “여교사가 남자아이의 대소변을 닦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나는 교사에 앞서 남자로 보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지방에서 아이돌보미로 활동하는 공영철 씨(56)도 여성가족부 건강가정지원센터가 제공하는 이수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남자가 왜 여기 있느냐”며 숙덕대는 중년 여성들 틈바구니에서 껄끄러운 열흘을 보내야 했다. 공 씨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에는 남녀가 따로 없다”며 “그저 아이들이 좋아 지원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현혜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교수는 “성에 관한 고정관념은 한번 형성되면 고치기 어렵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올바르게 교육하는 게 중요하다”며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대중매체와 보호자”라고 강조했다.
실제 대중매체에서는 여전히 직업에 대한 성차별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지난해 9월 진흥원이 일주일간 6개 방송사의 시청률 상위 드라마 22편을 분석한 결과 회사 임원이나 중간관리자 역할은 대부분 남자(73%)였고 변호사 의사 등 전문 직업군 또한 여성보다 남성이 많았다. 반대로 요리연구가 백종원 씨가 진행하는 ‘집밥 백선생’ 같은 프로그램은 ‘셰프(전문 요리사)’뿐 아니라 집밥을 만드는 사람도 남자일 수 있다는 인식을 퍼뜨리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 교수는 “대중매체에서 성평등 인식을 계속 개선해 나가면서 동시에 부모들에 대한 교육도 확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동안 성평등 교육은 아이들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는데, 아이들 스스로 인식을 바꾸는 게 아니라 아이들이 접하는 환경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영국 등 선진국에서는 이미 부모 교육에 더 가중치를 두고 있다”며 “우리도 학교나 직장, 지방자치단체에서 성인들이 성평등 교육과 시민교육을 접할 기회를 늘려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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