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극인 산업1부장
26일 타계 20주기인 최종현 SK그룹 선대회장은 1960년대 미국 유학 시절 인구도 적고 자원도 부족한 이스라엘이 미국 사회에서 자리 잡을 수 있었던 배경에 주목했다. 결론은 요로에 진출한 인적자원이었다. 최 회장이 재단을 설립해 국내 인재들에게 조건 없이 파격적인 유학비를 대준 배경이다. 돈 걱정 없이 24시간 공부에 전념하도록 해 세계 수준의 학자를 배출해야 한국도 일등 국가가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재단은 이런 식으로 지금까지 44년간 3700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최종현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늘 나라의 미래를 걱정했던 경세가였다. 밀턴 프리드먼 등 신자유주의학파 본산인 시카고대 출신답게 시장경제의 강력한 옹호자이기도 했다. 한국경제연구원장을 지낸 데 이어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을 3차례 연임하는 동안 세계적인 석학들을 초청해 한국 사회의 지적 지평을 넓히는 데 앞장섰다. 국가경쟁력 강화를 위한 보고서를 만들어 정부에 제출했고 김영삼 정부의 대기업 규제에 맞서다 설화를 겪기도 했다.
외환위기로 온 나라가 신음하던 이듬해 69세를 일기로 눈을 감을 때까지 최종현은 병마와 싸우면서도 ‘21세기 일등국가가 되는 길’이라는 유고집을 남기며 나라 걱정에 몰두했다. 눈을 감은 후에도 그는 당시 국내에서 기피하던 화장을 솔선수범해 장례 문화 변화를 이끌었다. 헬리콥터로 울산 정유공장을 방문하면서 우리나라 산천이 묘지로 뒤덮여 있는 데 놀라 유언을 남긴 것이다.
경영자로서도 그는 글로벌 감각과 스케일이 남달랐다. 부친이 위독하다는 소식에 시카고대 경제학 박사과정 도중 1962년 중도 귀국했다가, 경영난에 빠진 형 최종건의 부탁으로 옷감 짜는 회사(선경직물)에 입사해 오늘날 세계적 기업이 된 SK의 기틀을 다졌다. 1978년 2차 오일쇼크 때 사우디아라비아 왕족들과 구축해둔 신뢰를 바탕으로 한국에 대한 석유 수출 중단 조치를 풀어냈다. 자원이 국력이라는 점을 뼈저리게 느끼고는 유전 개발에도 뛰어들었다. 수백억 원을 날리는 실패가 거듭됐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1984년, 마침내 북예멘 유전 개발에 성공해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뤘다. 지금 SK는 9개국 13개 광구에서 하루 5만5000배럴의 원유를 생산하고 있다.
최종현은 1993년 이코노미스트클럽 강연에서 “국가경쟁력은 한국이 국제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전략이며 국민과 정부, 기업의 총체적 역량에 좌우된다”고 역설했다. 기업가 정신이 꺾이고, 앞이 안 보이는 한국경제의 현실 속에 새삼 그를 떠올리는 이유다. SK는 24일 서울 워커힐호텔에서 그를 기리는 20주기 행사를 갖는다.
배극인 산업1부장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