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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퓰리즘 남발 伊극우-극좌 연정… “타이타닉처럼 침몰할수도”

입력 | 2018-08-21 03:00:00

유럽 첫 포퓰리즘 연정 80일
경제장관 “현금지원 폐지” 밝히자… 극좌 대표가 앞장서 무산시켜




잔카를로 조르게티 이탈리아 총리실 차관은 19일 언론 인터뷰에서 “다음 달 전례 없는 대규모 인프라 확충 및 점검 계획에 착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닷새 전 일어난 제노바의 모란디 대교 붕괴 사고로 43명이 사망한 뒤 정부의 안전 불감증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커지자 즉각 반응한 것이다. 그는 “다리뿐 아니라 도로, 학교 안전까지 엄청난 규모의 공공 투자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돈이다. 조르게티 차관은 필요한 예산 규모나 조달 방안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은 채 “유럽연합(EU)이 이 프로젝트에 한해선 지출제한 규정을 적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했다. EU는 GDP 대비 재정적자가 3%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결국 국가 빚을 늘려서 재원을 마련하겠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국가 부채는 이미 GDP 대비 130%에 달해 그리스에 이어 유럽에서 두 번째로 높은 수준이다.

올해 3월 총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극우 동맹당과 극좌 오성운동은 3개월 가까이 이어진 무정부 상태를 끝내고 6월 1일 함께 유럽 최초의 포퓰리즘 정권을 탄생시켰다. 정부 출범 80일이 지나면서 이탈리아 연정이 포퓰리즘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복지 확대에 초점이 맞춰진 오성운동(극좌)과 감세에 초점이 맞춰진 동맹당(극우)이 결합하면서 포퓰리즘의 파괴력은 더 강력해지고 있다.

초미의 관심사는 이탈리아 정부가 다음 달 발표할 내년 예산안이다. 대선 때 발표한 포퓰리즘 공약들을 어느 정도 반영할지가 관심이다. 대표 공약들인 단일 세율 도입, 기본소득 도입, 연금 증대 등을 실현하려면 총 650억∼1250억 유로(약 83조∼160조 원)가 들어갈 것으로 추산된다.

주세페 콘테 총리는 “빚을 줄여가며 경쟁력 있는 예산안을 만들겠다”고 밝혔지만 이 정권의 대주주들은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 동맹당 마테오 살비니 대표는 “단일 세율 도입과 연금 혜택을 줄이는 개혁 해체는 반드시 제시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오성운동 루이지 디마이오 대표도 “기본소득을 보장하는 첫 초안이 제시될 것”이라고 밝히는 등 물러설 기미가 없다.

도저히 재정 충당의 방법이 나오지 않자 조반니 트리아 경제장관은 내년 예산안에 이전 민주당 정부가 EU와 합의한 부가가치세 인상을 포함시키고, ‘렌치 보너스’를 폐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2016년 도입된 렌치 보너스는 연소득 2만6000유로(약 3300만 원) 이하 저소득층 1100만 명에게 매달 80유로씩 현금으로 지원해주는 제도다. 이것만 폐지해도 90억 유로(약 11조 원)를 아낄 수 있었다. 그러나 수혜자들이 반발할 조짐을 보이자 디마이오 대표는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수혜자들의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지 않을 것”이라며 경제장관이 제시한 두 가지 재정 충당안을 모두 무산시켰다.

동맹당과 오성운동의 선명성 경쟁도 포퓰리즘을 가중시키고 있다. 내무장관을 맡고 있는 살비니 대표가 난민에 대한 강경 대처로 인기를 끌자 노동장관을 맡고 있는 디마이오 대표는 노동계의 요구가 담긴 노동 관련법 입법으로 맞불을 놓았다. 이탈리아 상원은 7일 새 정부의 첫 입법인 노동 관련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안은 계약직 기간을 최대 3년에서 2년으로 줄이고, 해고 시 회사의 비용을 늘리며 회사의 사회보장비용도 늘리도록 했다. 기업의 부담이 커지면서 연금관리공단(INPS)조차 이 법안으로 인해 매년 8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막지 못했다. 전문가들은 이 법안이 기존 노동자들에게는 유리하지만 청년 실업자들에게는 더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우려한다. 이탈리아의 청년 실업률은 30%대에 이른다.

새 정부가 펼치는 포퓰리즘 정책들이 국민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며 동맹당과 오성운동의 지지율은 선거 이후 계속 상승해 현재 60%에 육박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우려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고 있다. 신용평가그룹 무디스와 피치는 다음 달 이탈리아의 신용등급을 하락시키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바클레이스와 크레디트스위스, 씨티은행 등은 최근 리포트에서 “이탈리아의 새로운 경제위기가 임박했으며 타이타닉호처럼 무너질 수 있다”며 “투자자는 최악을 준비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파리=동정민 특파원 ditt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