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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클릭! 재밌는 역사]청나라에 다녀온 박제가, 분업-개방 등 조선의 혁신을 주장하다

입력 | 2018-08-22 03:00:00

조선의 국부론 ‘북학의’




박제가의 초상화와 ‘북학의’ 내·외편의 사진. 1790년 박제가가 두 번째 베이징에 갔을 때 화가 나빙이 그려 선물한 초상화와 시다. 40세 전후의 박제가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북학의는 2권 1책이며 내편 39항목, 외편 17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아일보DB

박제가나 ‘북학의’라는 책에 대해 한번쯤 들어보셨지요. 조선 후기 실학에 대해 공부하다 보면 반드시 나오는 인물과 책입니다. 박제가(1750∼1805)는 1778년(정조 2년) 외교 사절단으로 청나라 베이징을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했습니다. 1798년 농업과 신분제도의 개혁에 대한 주장을 가다듬어 ‘진상본 북학의’를 정조에게 바쳤습니다. 불행하게도 정조뿐만 아니라 당시의 관료와 지식인들은 ‘북학의’가 너무나 급진적이고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수용하기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18세기 후반 ‘북학의’의 혁신적 개혁 사상에 의해 개혁이 이루어졌다면, 조선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 청과의 교류를 통해 형성된 북학사상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 수립 70주년 경축식에서 축사를 하고 있다. 이 축사에서 문 대통령은 동아시아 철도 공동체에 대해 언급하였다. 동아일보DB

서울 출생인 박제가는 서자입니다. 현재 종로구 인사동 지역에서 생활했습니다. 주변에는 연암 박지원을 비롯해 홍대용, 이덕무, 유득공, 성대중 등의 선비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학문과 사상을 함께 공부하고 국가 정책의 방향을 두고 치열하게 토론했습니다. 당시 탑골공원에 있는 원각사 10층 석탑을 백탑이라고 불렀고, 이들이 탑 주변에 살고 있어 ‘백탑시파’라고도 불렸습니다. 박제가는 이들과 교류하면서 북학사상에 눈을 떴고, 조선 후기 가장 급진적 개혁사상을 담은 ‘북학의’를 저술했습니다.

북학사상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북학사상이 형성된 가장 결정적 계기는 이들이 외교 사절단(연행사)의 일원으로 청에 다녀온 것입니다. 박제가는 이덕무, 유득공 등과 함께 네 차례 베이징에 다녀왔습니다. 40일 정도를 걸어 베이징에 도착한 뒤 중국의 문물을 견학하고 지식인, 예술가들과 교류했습니다. 박제가는 선진 문물을 직접 견학하고 청의 기윤, 옹방강, 나빙, 홍양길 등의 지식인과 교류했습니다. 중국에서 교류한 학계와 문화계의 인물이 약 110명이나 되었습니다. 연행을 다녀오면 연행사 일행은 보고서를 작성해 정부에 바쳤습니다. 또한 일행이 가지고 온 책, 문물 등이 서울과 그 주변 지역의 양수리, 광주, 개성, 강화 등지의 선비들에게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예컨대 양수리 지역의 정약용 형제들은 연행사가 도착하면 서울로 말을 타고 달려가 책을 필사했습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연행사와 통신사를 통해 동아시아와 서구의 문물을 접하고 있었습니다. 북학사상의 형성은 청과의 교류가 가장 결정적이었고, 일본과의 교류도 일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 분업, 개방 등 혁신적이었던 ‘북학의’

박제가는 ‘북학의’ 내편에서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키고, 바닷길로 외국 여러 나라와 통상하며, 전국에 도로를 확충하고 운송 도구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수레, 배, 벽돌을 적극적으로 도입 △도로, 교량, 시장과 같은 사회간접자본 확충 △농기구, 수차, 잠업(누에 사육) 기계 등 도입과 자체 제작 △각종 물자와 제도 표준화 등을 주장했습니다. 외편에서는 △조선의 신분·과거제도 개편 △국민의 의식 개선을 담았습니다. 특히 조선의 진보와 발전을 가로막는 존재는 유학자들이라고 생각하고, 유학자들이 상업에 종사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혁신적 주장도 포함했습니다.

박제가의 혁신적인 주장 속에는 산업화 시대에도 적용해야 할 중요한 원리들이 숨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간접자본의 확충을 통해 유통경제를 활성화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외국과는 배를 이용해 대량의 상품을 운반하고, 국내에는 도로와 교량을 정비해 수레로 물건을 실어 날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선박을 통해 대량생산한 공업 제품과 농산물을 운반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표준화와 분업화의 장점을 인식했다는 점입니다. 특히 건축 자재의 생산 과정에서 표준화와 분업을 강조했습니다. 예로 벽돌의 생산 공정을 분업화하고 표준화한 뒤 벽돌로 집과 성벽을 쌓으면 비용 절약은 물론 건물도 튼튼해질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외에도 모든 산업 부문에 표준화와 분업 도입을 촉구했습니다.

셋째는 개방과 국제화를 강조한 점입니다. ‘북학의’에는 중국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20번쯤 나옵니다. 남에게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며, 일본의 제도와 기술도 배워야 할 대상이라고 했습니다. 불행하게도 박제가가 죽은 이후 조선은 이전보다 더욱 쇄국의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 ‘북학의’와 현재 우리나라의 정세

일부 학자들은 ‘북학의’를 ‘조선의 국부론’이라 부릅니다. ‘북학의’는 현재 우리나라가 처한 현실에서도 여전히 배울 점이 많은 책입니다. 최근 8·15 광복절 경축사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동아시아 철도 공동체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문 대통령은 “동북아 6개국과 미국이 함께하는 동아시아 철도 공동체를 제안한다”며 “우리 경제지평을 북방대륙까지 넓히고 동북아 상생번영의 대동맥이 되어 동아시아 에너지공동체와 경제공동체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경제 발전 과정에서 해양을 통해 미국, 일본, 유럽과 무역을 했습니다. 하지만 북한 때문에 중국, 러시아와의 철도와 육로 교통은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습니다. 만약 우리나라에 철도 공동체가 성립된다면 해양과 육로 교통이 모두 열립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북학의’가 저술된 18세기 후반보다 자본과 기술이 더 많이 축적되어 있기 때문에 경제성장의 새로운 계기를 더 빠르게 마련할 수 있습니다. 중국 외에도 러시아를 통해 중앙아시아, 유럽과 교류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된다면 새로운 경제성장의 기회가 올 것입니다.

이환병 서울 용산고 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