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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주성원]여홍철과 여서정

입력 | 2018-08-25 03:00:00


“이 순간은 우리 모두의 아들입니다. 여기 우리 아들도 뛰지 않습니까.” 2002년 한일 월드컵 16강전, 한국이 이탈리아에 역전승을 거둔 직후 중계방송 해설을 하던 차범근 전 국가대표 감독이 결국 아들 차두리에 대해 참았던 애정을 드러낸 장면은 유명하다. 23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아경기 체조 중계석에서 딸 여서정의 뜀틀 결선 장면을 지켜본 여홍철 경희대 교수의 심정도 비슷했을 것 같다. 애써 흥분을 감추려 했지만 금메달이 확정되자 결국 “내려가서 안아주고 싶다”며 ‘딸 바보’ 속내를 드러냈다.

▷스포츠 스타 출신 부모의 재능을 자녀가 물려받는 일은 드물지 않다. 이번 아시아경기에도 남자 농구에 허재 대표팀 감독의 두 아들 허웅, 허훈이 뛰고 야구에서는 이종범, 이정후 부자(父子)가 코치와 선수로 참가했다. 하지만 체조 같은 비인기 종목에서 아버지와 딸이 같은 길을 택한 경우는 흔치 않다. 여 교수는 “체조 선수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 때문에” 딸의 체조 입문을 반대했다고 한다.

▷딸을 가진 최고경영자(CEO)가 경영하는 기업이 그렇지 않은 기업보다 여성 채용을 많이 한다는 연구가 있다. 아버지의 판단과 행동에 딸이 영향을 미친다는 이른바 ‘딸 효과(daughter effect)’다. 반면 미국 심리학자 모린 머독은 ‘여성 영웅의 탄생’에서 딸이 어떻게 아버지의 영향을 받게 되는지를 파헤치며 ‘아버지의 딸(father‘s daughter)’이라는 개념에 주목했다. 이렇듯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것이 아버지와 딸의 관계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쓴 여서정이 정작 힘들어 그만두고 싶을 때 “차마 부모님께 말하지 못했다”고 털어놓은 것을 보면 ‘체조 부녀’도 다르지 않아 보인다.

▷소설가 한승원은 맨부커상을 수상한 딸 한강을 두고 “승어부(勝於父·아버지를 뛰어넘는 것)가 가장 큰 효도”라며 기뻐했다. 경기를 마친 여서정은 “올림픽에서도 금메달을 따 아빠 목에 꼭 걸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아시아경기 2연패를 한 여 교수는 올림픽에서는 은메달에 그쳤다. 여서정이 2년 뒤 도쿄 올림픽에서 ‘승어부’의 효를 이룰 것도 기대해 본다.

주성원 논설위원 s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