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14화> 48인
서대문감옥은 1908년 경성감옥으로 개소한 이후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일제는 항일투쟁으로 수감된 독립운동가들이 늘어나자 감옥을 증축했다(왼쪽 사진). 왼쪽 사진의 원 안 건물(본관 보안과 청사)이 현재 전시관으로 바뀌어 있으며 이 건물 지하에 고문방이 있다(오른쪽 사진). 동아일보DB
기자는 간수장으로부터 “(3·1)소요사건 관계자로 현재 (수감된) 수효가 1860여 명에 달한다”는 말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경성과 각 지방에서 잡혀온 ‘소요범’ 가운데는 어린 여학생을 포함한 여성이 28명, 농민과 무직자 다수, 약 300명의 야소교(기독교) 신도와 적지 않은 천도교인 등 종교인도 있다는 설명도 곁들여졌다. 매일신보는 6월 10일자에 ‘서대문 감옥의 소요 범인들이 온순하게 근신하고 있으며, 감옥의 친절한 대우에 매우 기꺼워하는 중’이라는 제목을 대문짝만하게 내걸고 탐방 기사를 실었다. 일제가 독립만세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을 ‘선동’ ‘소란’을 일으킨 소요범이라 부르며 의미를 축소한 것을 보여준다.
서대문감옥 중 중범죄자를 수감하는 미결감 독방은 3·1독립운동 민족대표들로 가득 찼다. 3월 1일 일경에 체포된 33인 민족대표 중 32명(기독교계 대표 김병조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이 이곳으로 이감됐다. 수감된 민족대표들에 대한 집요한 신문 과정에서 드러난 2선조직 17명도 잇따라 붙잡혀 왔다.
친일 기관지 매일신보 기자가 100년 전 찾았던 감옥이지만 이제는 역사 교육장으로 바뀐 그곳을 8월 21일 다시 찾아갔다. ‘민족대표 48인’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실제 생활하던 독방은 어떠했는지 보고 싶었다. 하지만 역사관 관계자는 “현재 멸실돼 남아 있지 않다”고 말했다. 역사관으로 재단장한 형무소는 원래 규모가 축소되는 과정에서 민족대표들이 수감됐던 독방들도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다른 독방을 통해 민족대표들의 수감 생활을 헤아리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민족대표들은 1평짜리 독방에 갇혀 있으면서도 바깥세상 돌아가는 일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 명씩 일반인과 학생들이 잡혀오고 감방마다 아침저녁으로 만세 소리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감옥에서 민중의 호응에 감동한 민족대표들은 의연하게 수감생활을 했다. 민족대표들은 아침저녁 점검 때 일본인 간수부장에게 무릎을 꿇고 인사를 해야 하는 감방규칙도 무시했다. 불교계 대표 한용운은 평소 정좌 자세로 참선을 하다가도 점검 때면 편한 자세로 바꿔 앉아 간수장을 빤히 치켜 올려다보곤 했다. 감방 안에서도 독립만세를 부르던 이갑성은 한번 들어가면 1주일간 햇빛을 볼 수 없고 이부자리도 주지 않는 ‘벌감(罰監)’ 처분을 자주 당했다.
이갑성, 오화영 두 민족대표는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을 맞아 서대문감옥과 마포 경성감옥 수감자들이 일제히 만세를 외치는 운동을 주도했다. 이날 정오가 되자 공장에서 일하던 기결수는 모두 일손을 멈추었고 감방 안 미결수들은 만세를 외쳤다. 1700여 명이 부르는 만세 소리는 이웃 공덕동 일대에서도 들려 만세를 따라 부를 정도였다.(‘형정반세기’)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 3면에 당시 공판 중인 48명의 민족대표 얼굴을 모두 실었다.
서대문감옥 본관 보안과 청사 지하에는 ‘취조실’이라는 팻말이 붙은 방이 있었다. 말이 취조실이지 고문이 자행되는 곳이었다. 전등 없이는 한낮에도 캄캄한 8평짜리 방은 무간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한쪽 벽에는 갖가지 고문 도구들이 걸려 있고, 천장 쇠고리에 달려 있는 올가미 밧줄은 사형장의 그것과 흡사했다. 현재도 이 모습은 그대로 재현돼 있어 창살 너머로 보는 것만으로도 등골이 오싹하고 공포감을 느끼게 한다.
고등계 형사들은 이곳에서 온몸을 발가벗겨 놓고 가죽 채찍으로 매질하기, 코에 고춧물 붓기, 시멘트 바닥에 무릎 꿇리고 구둣발로 짓밟기, 손·발톱 찌르기와 뽑기 등 악랄한 고문을 했다.
어느 날부터 민족대표들이 극형에 처해진다는 얘기가 나돌아 감옥을 공포 분위기로 몰아넣었다. 일제는 독립선언서 공약삼장 중 ‘최후의 일각, 최후의 일인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는 제2장의 문구를 물고 늘어졌다. 폭동을 선동하는 문구로 보고 민족대표들에게 사형 선고가 가능한 내란죄로 옭아매려 했다.(손병희, 최린, 최남선, 한용운 등에 대한 신문조서)
“듣건대 고문이 점차 극심해져서 그 정도가 이를 데 없이 가혹하다. 어떤 대표는 벌벌 떨면서 방성대곡하고 있으니 이게 도대체 될 법한 일인가. 그래서 한용운이 공포에 떨고 있는 몇몇 사람에게 인분(人糞)세례를 퍼부은 게 아닐까. 통곡하는 자 머리에 인분을 쏟아부었던 사실은 너무 유명한 일이다. 우리 민족대표가 공포에 떨거나 비열한 행동을 자행한다면 그를 따르는 우리 민중은 장차 어디로 간다는 말인가.”(‘묵암비망록’)
그러나 손병희, 이승훈, 권동진, 오세창, 최린, 김창준, 홍기조, 양한묵, 신석구, 나인협, 정노식, 김도태, 박인호, 김원벽, 강기덕 등 대부분의 민족대표는 끝까지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이종일은 일기에 그 이름을 일일이 기록하며 “마음 든든하다”고 감회를 밝혔다.
49명의 민족대표가 감옥에 수감된 지 3개월째 되던 5월 26일, 비보가 날아들었다. 56세를 일기로 양한묵이 급사했다는 것이다. 시신을 인수한 양한묵의 아들은 인력거에 상여를 싣고 북촌 계동 집으로 가던 중 종로 사거리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미친 듯이 불렀다. 일경은 이를 간섭하지 않았고, 자세한 내용을 모르는 거리의 시민들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양한묵의 자택에서 미국인 세브란스병원장을 불러 검시를 했다. 뇌일혈이라는 진단이 나왔다.(박래원의 ‘내가 겪은 기미년 3월 1일’, 신인간 1975년 3월호)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가 양한묵 사망 직후 서대문감옥의 ‘소요’ 참가 수감자들이 잘 지내고 있다는 날조 기사를 내보낸 것은 민심 폭발을 무마하기 위한 것이었다.
3·1운동 이후 ‘민족대표 48인’이 널리 알려졌는데, 이는 체포돼 재판까지 받은 인물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양한묵은 수감 중 재판도 받기 전에 사망해 포함되지 못했다. 3·1운동 이듬해인 1920년 4월 1일 창간한 동아일보는 그해 7월 12일 3면 ‘금일 대공판(今日 大公判)’이라는 기사에 민족대표 48인의 얼굴을 모두 실었다.
○ 옥중의 항일 투쟁
48명 민족대표 중 서대문감옥에서 가장 주목을 끈 인물은 단연 만해 한용운(1879∼1944). 승려 한용운은 3·1독립운동 기획 초기에는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었다. 그는 일제 첩자라는 의심까지 받아가면서 독립운동 거사에 끼워달라고 간청했다.(‘서정주 문학전집·2’에 수록된 현상윤의 발언)
그의 진가는 옥중에서 두드러졌다. 그는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받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이라는 옥중 투쟁 3대 원칙을 정해 놓고 ‘최후의 일각’까지 실천했다.
한용운의 옥중 투쟁 중 1919년 7월 10일 검사 신문에 서면으로 답하는 ‘조선독립의 서’는 해외에까지 알려졌다. 비밀리에 바깥으로 흘러나온 서면 답변서는 자료 없이 쓴 한 편의 ‘논문’이었다. 1919년 11월 4일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발간하는 ‘독립신문’ 제25호(부록)는 전문을 실었다. 최남선 대신 자신이 3·1독립 선언서를 쓰겠다고 했으나 이루지 못한 한용운의 꿈은 이 글로 이루어졌다.
그의 옥중 투쟁은 동아일보 보도로 국내에도 널리 전파됐다. ‘한용운의 맹렬한 독립론, 국가의 흥망은 오로지 민족의 책임’ ‘독립은 민족의 자존심’(1920년 9월 25일)은 한 예에 불과하다. 그는 민족적 자존심의 대변자로 우뚝 섰다. ‘대쪽 소신’과 ‘강철 기개’로 일제에 굴하지 않은 한용운은 암흑시대를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희망의 등불이 돼주었다.
한용운 외에도 대다수 민족대표는 일경의 고문과 고초를 끝까지 견뎌냈다. 1920년 10월 30일 결심 최종 공판에서 애초 내란죄로 극형에 처해질 뻔했던 민족대표들은 보안법과 출판법 위반 등만 적용됐다. 최고 3년형을 받은 이들은 천도교계 대표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기독교계 대표 이승훈 함태영, 불교계 대표 한용운 등 모두 8명이었다. 3·1운동 기획 단계에 가담한 송진우, 현상윤 등은 ‘예비 음모’를 처벌하는 규정이 없어 무죄로 석방됐다. 그러나 모두들 이미 1년 7개월여 혹독한 고문을 받은 뒤였다. 48명의 민족대표 중 손병희, 이종일, 박준승 등 고령 민족대표들은 감옥생활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조선총독부가 민족대표들을 중형으로 처벌하지 못한 데는 그 나름의 계산이 있었다. 중형을 선고할 경우 언제 폭발할지 모를 민심에 불을 지를 수 있다는 동향 분석 때문이었다. 3·1운동은 일제로 하여금 무단(武斷)으로 한국인들을 더 이상 지배할 수 없으며, 유화책을 펼치게 하는 전환점이 됐다.
▼ ‘일진회 첩자’ 오인받은 韓… 죽음 각오하고 교민대표 엄인섭 찾아가 ▼
33인 민족대표 중 유일하게 연해주 방문한 한용운 발자취 따라가보니…
1905년 봄, 한용운이 해삼위(海參崴)로도 불린 이곳을 찾았을 때는 러일전쟁의 포성이 한창이어서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팽배했다. 이런 분위기가 이곳 동포들이 만해를 받아들이지 않는 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조선 동포들은 머리를 빡빡 깎아 일본인처럼 보이는 한용운을 친일단체인 일진회의 첩자로 오인했다. 심지어 한용운을 죽이려는 위협도 가해졌다.(고재석, ‘한용운과 그의 시대’)
경위는 이랬다. 첩자로 지목된 한용운은 죽기를 각오하고 해삼위 교민대표 엄인섭을 찾아가 다짜고짜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그의 대범함에 놀란 엄인섭은 자신의 명함을 주며 통행증으로 쓰라면서 귀국할 것을 권고했다. 한용운은 겨울에도 얼지 않는다는 부동항을 구경하려고 바닷가에 나왔다가 그만 조선인 청년들에게 붙들렸다. 엄인섭의 명함도 통하지 않았다. 바다에 수장당하기 직전 러시아 경관들에게 간신히 구조됐다. 한용운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방성대곡을 했다.(‘한용운 전집’)
올해 초 한용운의 러시아 행적을 조사하기 위해 ‘만해로드 대장정’ 탐방단을 이끌고 연해주를 찾은 동국대 고재석 교수(만해연구소 소장)는 “만해가 연해주행에 관해 쓴 글을 읽어보면 해삼위에서 국내외를 연계한 독립운동 가능성을 타진한 것 같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만해는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이기는 쪽에 희망을 걸고 일제에 대항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곳을 방문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기자는 한용운이 수장될 뻔한 바닷가 금각만(金角灣)을 찾아가 바닷바람을 맞으며 동포들로부터 버림받은 그의 참담함을 헤아려 보았다.
1909년 10월 26일, 한용운은 안중근이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제거한 의거를 듣고 엄인섭과 블라디보스토크의 기억을 떠올렸을 것이다. 한용운에게 명함을 건네준 엄인섭이 바로 1907년 안중근과 결의형제를 하고 의병조직인 동의회를 조직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한용운은 시로 안중근을 ‘만 석의 뜨거운 피와 열 말의 담력을 지닌’ 인물로 묘사하면서 그의 의거를 기렸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말은 없다지만, 만일 엄인섭이 자신의 외삼촌이자 ‘연해주 독립운동의 대부’인 최재형(1858∼1920)과 한용운을 만나게 했다면 역사가 달리 전개됐을지도 모른다. 당시 해삼위 최고의 부호였던 최재형은 자신의 전 재산과 목숨을 독립운동에 내놓았던 애국지사였고, 안중근의 의거를 위한 일체 자금을 댄 인물이다. 그런 최재형이 안중근 못지않게 투사 성향이 강한 한용운을 모른 척하지는 않았을 게다.
그러나 역사의 시계는 한용운보다 뒤늦게 해삼위를 찾은 안중근에게 해외에서의 ‘대업’을 부여했다. 여비도 다 떨어진 한용운은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크라스키노 등을 지나 두만강을 건너 걸어서 국내로 돌아온 후 3·1만세운동의 주역이자 48인 민족대표로 ‘꺼지지 않는’ 민족의 등불이 됐다. 고 교수는 “안중근의 단지동맹비가 있는 크라스키노에 만해의 독립운동 기념비를 세우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토크=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