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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김상운]처칠의 편지와 ‘책임전가 전략’

입력 | 2018-08-27 03:00:00


김상운 정치부 기자

“영국이 모든 재정을 소비한 뒤 뼈만 앙상하게 남고 미국만 건전한 재정을 유지한 채 전쟁에서 승리한다면 이는 올바른 일이 아닐 겁니다.”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가 1940년 12월 8일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는 동맹국에 대한 서운함이 배어 있다. 정상 간 서신치곤 이례적으로 긴 이 편지에서 처칠은 영국이 처한 자금난을 호소하며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을 요구했다. 당시 미국은 영국의 거듭된 참전 요청에도 불구하고 국내 반전 여론을 이유로 전투병 파병에 응하지 않았다.

미국이 참전을 미루는 사이 유럽 대륙을 휩쓴 히틀러의 공격으로 영국의 피해는 갈수록 커졌다. 궁지에 몰린 처칠은 루스벨트를 만나러 대서양을 오가며 미국의 참전을 호소하는 편지를 약 1000통이나 보냈다. 루스벨트는 편지를 받고 1941년 12월 8일, 일본으로부터 진주만 공습을 당한 직후에야 참전을 선언한다.

‘공격적 현실주의’ 대가인 존 미어샤이머 미국 시카고대 교수 같은 국제정치학자들은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뒤 약 2년이 지나 미국이 참전한 배경에는 자국 군대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책임전가(buck-passing)’ 전략이 깔려 있었다고 분석한다.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나치의 힘을 최대한 빼놓을 때까지 참전을 늦추며 기다렸다는 것이다. 피를 나눈 혈맹이 눈앞에서 커다란 곤경에 처했더라도 자국 이익을 우선시하는 국제정치의 냉혹한 현실을 보여주는 사례다.

한미관계가 혈맹이라지만 요즘 상황은 여기서 딱히 예외일 수 없다. 최근 방위비 분담금과 미군기지 반환을 위한 양국 협상에서 동맹 간 책임전가 전략이 자주 엿보인다. 미국은 올해 방위비 분담금에 미군 전략자산 전개 비용을 추가해야 한다고 한국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방위비 분담금은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을 지원하는 목적이며, 한반도에 상주하지 않는 전략자산을 전개하는 비용은 이와 무관하다는 입장이다. 최근 더불어민주당 김경협 의원이 공개한 한국국방연구원 자료에 따르면 한국 정부는 2015년 주한미군 주둔비용으로 총 5조4564억 원을 지급했다. 미군 1인당 주둔비용으로 따지면 주일미군(약 1억 원)의 약 2배에 이른다.

주한미군 기지 반환 협상도 사정은 비슷하다. 최근 공개된 환경부 보고서에 따르면 기지 반환을 추진 중인 강원 원주시 ‘캠프 롱’ 주변에서 석유계총탄화수소(TPH)와 벤젠, 카드뮴, 아연 등 오염물질이 기준치의 최대 18배까지 확인됐다. 그러나 미국이 환경오염 정화 비용 부담을 거부해 협상이 지지부진한 상태다.

미국은 방위비 증액을 한국에 적극 요구하면서도 미군이 일으킨 환경오염 복구 책임은 미루고 있다. 국제관계에서 어느 정도의 책임전가는 불가피하지만 동맹 상대국이 감내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것은 곤란하지 않나 싶다. 더구나 북한 비핵화 협상 국면에서 한미 양국의 긴밀한 협조는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 지금 상황에서 처칠 총리 당시 영미 사이의 책임 전가가 한미관계에서도 벌어진다면 이익을 보는 것은 한미 양측, 어디도 아닐 것이다.

김상운 정치부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