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동주·사회부
민갑룡 경찰청장(53)은 27일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열린 정례 기자간담회에서 고심에 찬 표정으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최근 경찰청 인권침해사건 진상조사위원회가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투쟁대회와 관련해 경찰이 주최 측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을 취하하라고 권고한 데 대한 의견을 물은 직후였다.
경찰은 당시 폭력시위로 경찰 버스 등 차량 52대가 파손되고 경찰관 92명이 다쳤다며 2016년 2월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등을 상대로 3억8620만 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냈다. 현재 서울중앙지법에서 1심이 진행되고 있다. 민중총궐기에서 불법 폭력시위가 벌어졌다는 것은 한상균 당시 민노총 위원장이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입증됐다. 하지만 진상조사위는 ‘경찰의 과잉 대응으로 생긴 피해’라며 주최 측에 배상 책임을 묻지 말라고 권고한 상태다.
민 청장은 최근 참모들에게 권고안 처분에 대한 고충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 과거사 청산을 수행하는 진상조사위의 권고라는 점에서 부담을 느끼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불법 행위에 따른 피해만큼 배상을 청구한다는 원칙에 따라 소송을 제기했고, 재판 절차가 진행 중인 만큼 굳이 소송을 취하해 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많다.
실제 일선 경찰관들은 진상조사위의 권고에 부글부글하는 분위기다. 경찰 내부게시판에는 ‘정권이 바뀌었다고 위법행위에 서로 다른 잣대를 들이대면 우리 스스로 정치경찰이라는 걸 인정하는 셈’이란 글에 댓글 180여 개가 달렸다. 대부분 공감한다는 내용이다. “권고안을 받아들이면 청장 개인이 살겠다고 조직 전체를 죽이는 것”이라는 목소리까지 나온다.
민 청장은 취임사에서 “경찰은 제복 입은 시민이며 공동체를 대표해 안전과 질서를 수호하는 사명을 부여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불법 폭력시위에 피해를 입더라도 제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손해배상 책임조차 못 묻게 한다면 어떤 경찰도 안전과 질서 수호에 발 벗고 나서지 않을 것이란 점을 민 청장도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조동주·사회부 dj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