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극인 산업1부장
건설 부문뿐 아니다. 요즘 기업인들을 만나보면 심심찮게 한국 경제 위기설을 화제로 올린다. 어느 제조업체 대표는 추가적인 고정자산 투자를 전면 중단시켰다고 했다. 한 금융권 인사는 부자들 사이에 현금성 자산을 늘리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외환위기 때처럼 헐값에 나온 자산을 사들일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6월 시중 통화량(M2)은 1년 전보다 6.1%나 늘었다. 2년 미만 정기 예·적금, 수익증권, 요구불예금 등에 자금이 몰린 탓이다.
위기설의 근거는 여러 가지다. 예컨대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금리를 계속 올리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 유출 위협에 놓이는 한국도 금리를 올릴 수밖에 없는데, 이 경우 가계부채 폭탄에 고용 쇼크로 가뜩이나 취약한 한국 경제에 치명타가 된다는 것이다. 미국의 보호무역주의와 미중 무역분쟁도 기업인들이 주목하는 외생변수다.
본보가 연재 중인 ‘한국 제조업 골든타임을 지켜라’ 시리즈가 국내 주력 산업을 심층 조사한 결과 디스플레이와 조선, 기계는 중국에 이미 추월당했다는 게 업계의 공통 인식이었다. 휴대전화는 추월 직전이고 자동차와 철강은 2∼3년, 반도체는 3∼4년의 여유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이 여유조차도 급속히 줄어들고 있다. 한때 한국 반도체 기술자를 빼가면서 적용하던 ‘삼삼은구’(3×3=9·기존 연봉의 3배로 3년 계약해 한국에서 9년 일한 만큼 대우) 법칙도 사라진 지 오래라는 게 업계 얘기다.
한국이 외환위기를 맞은 첫 번째 이유로 꼽히는 것은 김영삼 정권의 ‘1만 달러’ 소득 집착이다. 1995년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달성하고 이듬해 선진국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한 게 패착이었다. OECD 가입을 위해 금융시장을 개방했고, 원화 고평가를 유지하려 막대한 외환보유액을 시중에 풀었다. 뱁새가 황새 따라가려다 가랑이가 찢어진 셈이었다.
기업의 미래가 없는 상황에서는 위기 때 자산을 사들여봤자 다시 오른다는 보장이 없다. 자산 가격이 끊임없이 하락하는 일본식 ‘잃어버린 20년’이 재연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런 만큼 현 정권은 과거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길 바란다. 다만 이상주의적으로, 또는 이념적으로 밀어붙이는 듯한 소득주도성장 정책에서 뱁새의 교훈이 떠오르는 것은 걱정스럽다. 경제 주체들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도 간과해선 안 된다. 위기의식이 위기를 불러온다는 자기실현적 위기 가능성 때문이다.
배극인 산업1부장 bae215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