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00일의 썸머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
‘이 영화는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사랑 이야기는 아니다’라고 능청을 떨며 시작하는 영화 ‘500일의 썸머’(감독 마크 웹)를 누군가는 로맨스의 바이블이라고 한다. 바이블까진 아니어도 내겐 로맨스 영화 만들기에 많은 영감을 준 작품이다. 우울한 브릿 팝을 들으며 컸고, 마이크 니컬스 감독의 영화 ‘졸업’을 ‘생각 없이 무료하게 살던 젊은 한 남자의 충동적인 행동을, 역경을 헤치고 운명의 여자를 쟁취하는 이야기’로 오독한 어수룩한 이 남자, 톰(조지프 고든 레빗)이 ‘운명’이라 여겼던 여자 썸머(조이 데이셔넬)와 어떻게 만나고 헤어졌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500일간의 이야기를 기승전결식으로 풀었다면 고루했을 것을 뒤죽박죽 널려 있는 레고를 조립하듯 톰의 연애 기억을 따라 재구성하는 형식은 우리 보통의 연애가 ‘기억’에 따라 어떻게 부딪치고 이어지는지 참신하게 보여준다. 두 사람이 결국 헤어진 후 마지막으로 만난 날인 488일에서 시작해 1일, 290일, 3일 등으로 종횡무진하는 듯하지만 그 속엔 연애의 설렘과 흥분과 실망과 착각과 오해와 이해의 과정이 때론 반짝이고, 또는 씁쓸하게 새겨진다. 500일째 되는 날 새로운 날을 여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이 영화는 한바탕 연애를 겪어 이제 조금은 달라진 톰이 새로운 여자를 우연히 만나는 데서 끝난다. 그 ‘우연’이 ‘운명’이 될지는 또 모를 일이지만. 새로 만난 그녀의 이름은 ‘어텀’이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처럼.
훌륭한 로맨스 영화는 대체로 주인공들이 이야기를 통해 결국 ‘성장’한다. 톰과 썸머처럼. 되돌아보면 부끄러운 지난날도 결국엔 조금 나은 사람으로 한 뼘 자라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따뜻하게 지켜봐 주는 것, 우리가 로맨틱 코미디나 멜로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500일의 썸머’는 두 주인공이 영국의 록밴드 ‘스미스’의 음악으로 첫 인연을 맺은 이후 수많은 노래와 음악의 향연이 이어진다. 계절이 바뀌는 이때쯤 눈과 귀가 호강할 로맨스 영화 한 편이다.
심재명 영화사 명필름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