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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日에 ‘경험’ 뒤지고 中엔 ‘내수’ 밀려… 제조업 기초산업 휘청

입력 | 2018-09-04 03:00:00

[한국 제조업 골든타임을 지켜라]8대 주력산업 점검 <8> 기계




지난달 22일 경남 김해시 골든루트산업단지의 폐업한 기계공장에 ‘공장 터를 판다’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김해=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지난달 22일 오후 2시 공작기계 제조업체가 밀집한 경남 김해시 골든루트산업단지. 한창 일할 때였지만 기계 제조업체 A사의 공장 문은 닫혀 있었다. 마당에는 포대에 담긴 건설폐기물과 나무판자가 쌓여 있었다. 창문에는 ‘현 공장 매매’라는 글과 전화번호가 적힌 노란색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바로 옆에는 ‘정부지원 햇살론대출’이라고 적힌 플래카드도 보였다. 이웃 공장 직원은 “조선업이 침체되면서 기계 주문량이 줄어든 탓에 문 닫는 공장이 하나둘 늘고 있다”고 전했다.

부산에 있는 한 기계부품 업체의 B 이사는 요즘 죽을 맛이다. 국내 판로가 줄어 독일 등 해외 바이어들과 연이어 만나는데 그때마다 “품질은 괜찮지만 가격을 감안하면 중국 제품과 비교해 큰 차이가 없다”는 답을 듣는다. 이런 상황에서 회사의 어려워진 재무 상황까지 상대방이 알게 되면 거래가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국 기계산업이 독일과 일본 등 기술 선진국을 따라잡기 전에 중국이 급성장하며 시장을 잠식당하고 있다. 다시 경쟁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기술력 확보와 함께 기계에 정보기술(IT)을 접목하는 등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 샌드위치 신세, 한국 기계산업

‘기계를 만드는 기계’인 공작기계의 경쟁력은 그 나라 제조업 경쟁력과 직결된다. 좋은 기계가 있어야 좋은 부품을 만들 수 있고, 좋은 부품이 있어야 좋은 완제품이 나온다. 기계는 크게 공작기계와 건설(토목)기계로 나눌 수 있는데 공작기계로 자동차나 항공기, 스마트폰 등 완제품에 들어갈 부품을 만들어낸다. 쇠나 알루미늄을 정밀하게 깎아 원하는 형상을 만드는 ‘NC선반’이나 ‘머시닝센터’ 등이 대표적인 공작기계다. 쇠를 깎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열과 진동 때문에 발생하는 미세한 차이까지 제어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기술력이 요구된다.

현재 한국 기계산업은 ‘샌드위치’ 신세다. 독일 일본 등 선진국에는 기술력에서 뒤지고 중국 제품과 비교하면 가격경쟁력을 따라갈 수 없다. 최근에는 중국 기계 기업들의 기술 개발까지 가속도가 붙으면서 국내 기계산업의 어려움은 더 커지고 있다. 세계 최고인 독일의 기술력을 기준으로 일본은 1∼2년, 한국은 4∼5년, 중국은 6∼7년 정도 뒤지는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한중 격차가 독일과 한국의 차이보다 작다.

공작기계 및 산업용 로봇 제작업체 ‘SMEC(스맥)’의 장석현 전무는 “매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리는 중국국제공작기계전시회(CMIT)를 찾는데 중국 업체들이 기술 독립을 이루고 있는 것이 확연히 눈에 띈다”며 “올해는 공작기계를 제어하는 핵심 부품인 컨트롤러를 자체 생산하는 경우가 많아진 것 같다”고 말했다.

중국의 선전은 숫자로도 증명된다. 중국의 공작기계 생산량은 2008년 139억6000만 달러(약 15조6310억 원)에서 지난해 245억2000만 달러로 75.6%나 성장했다. 한국은 같은 기간 43억7200만 달러에서 48억5300만 달러로 11% 증가하는 데 그쳤다.

중국은 한국의 가장 큰 수출시장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국이 점차 자국산 제품으로 수입 기계를 대체하다 보니 한국의 기계 수출국 중 중국 비중은 2016년 28.0%, 지난해 25.1%, 올 상반기 22.3%로 계속 낮아지고 있다. 미국 베트남 독일 이탈리아 등 다른 시장에선 중국뿐 아니라 독일 일본 제품과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지고 있다. 이 때문에 기계 제조업체가 몰린 산업단지마다 폐업이 속출하고 있는 것이다.

○ 짧은 시간에 압축적 경험 쌓는 중국

한국이 중국의 추격을 받고 있는 것은 기술력의 핵심인 ‘경험 축적’이 선진국 수준에 다다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주종남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교수는 “IT산업과 달리 기계는 설계도만 있어서는 베낄 수 없는 ‘경험’이 굉장히 중요한데 그것은 수많은 실패와 시행착오가 필수”라며 “독일과 일본 등 기술 선진국은 100년 넘게 경험을 축적했지만 한국은 아직 역사가 짧다”고 했다.

중국도 경험 축적의 역사는 짧지만 거대한 내수시장으로 이를 극복하고 있다. 자국 시장에서 엄청나게 많은 제품을 만들면서 다양한 문제 사례가 쌓이고 그걸 해결하면서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경험을 쌓는 것이다. 경험과 시장이 모두 없는 한국으로선 부러울 따름이다.

국내 기계산업 구조가 대기업을 정점으로 수직계열화돼 있다 보니 중소기업이 자체 기술력을 갖추지 못한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상당수 중소기업은 대기업 한 곳에 의존하면서 발주 물량을 싸게 납품하기에 바빠 기술개발을 할 여력이 없다.

장 전무는 “공작기계에 들어가는 부품 공용화도 중소기업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한 방법”이라며 “한국 업체들끼리라도 표준화된 부품을 쓰면 가격경쟁력을 갖추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김해=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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