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치욕적인 사건의 원인은 외교의 실패였다. 회령에 거주하던 먼터무는 과거 태조를 섬겼던 친한파 여진족이었다. 태종 때 명나라가 만주의 여진족에게 관직을 수여하는 등 적극적인 회유정책을 시작하면서 조선에 명과 먼터무 사이의 중재 역할을 요청했다. 조선은 명의 요구를 들어주는 척하면서 먼터무에게는 명의 관직을 받지 말라고 부추겼다. 먼터무는 조선의 체면을 세워주는 척하다가 명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베이징에 가서 영락제를 직접 알현했다. 상식적으로 먼터무가 명의 제안을 거부할 리가 없는데, 조선은 별다른 우대책도 제시하지 않다가 허를 찔렸다. 그러고는 분노했다. 1410년 호전적인 여진 부족이 경원을 습격해 병마사를 살해한 대사건이 벌어졌다. 조선은 이들을 토벌하면서 먼터무를 의심해 그의 일족을 살해했다. 조선은 먼터무가 먼저 배신했다고 하지만 진상은 확실치 않다. 먼터무는 조선에 등을 돌렸고 앞장서서 경원을 공격해 아오지 전투를 벌였고 조선을 몰아냈다.
외교는 첫째도 현실, 둘째도 현실이고, 항상 상대의 입장에서 판단해야 한다. 국제정세는 냉혹하고 철저하게 자국의 이해관계로 움직인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외교에 약한데, 이유는 늘 비슷하다. 상대를 쉽게 무시하고(그 용기만은 놀랍다) 우리 입장에서만 판단한다. 명분에 집착해서 이런 행동은 자주적, 이런 행동은 굴종적이라고 미리 공표하고 움직인다. 그러니 상대를 이길 수도 이용할 수도 없다. 어째 요즘도 전혀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임용한 역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