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윤복, ‘여속도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조선시대에 아무리 먹을 것이 귀했다지만 채소 정도는 실컷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조선시대 농부들은 채소를 심지 않았다. 채소를 심을 땅도 없고, 재배할 겨를도 없었기 때문이다. 벼농사와 채소농사는 병행하기 어렵다. 채소 심을 땅이 있으면 곡식을 심는 게 낫다.
채소값은 결코 싸지 않았다. 조선 후기 국가 조달 물자의 가격을 기록한 ‘물료가치성책’에서 50여 종의 채소값을 확인할 수 있는데, 배추 1근 가격이 쌀 2말, 파 한 단이 쌀 1되, 상추 한 단이 쌀 5홉이다. 지금처럼 크고 좋은 것도 아니었을 테니 이 정도면 귀한 음식이라고 하겠다. 채소 종자도 귀했다. 궁중에 채소를 납품하는 내농포(內農圃)의 채소 종자는 중국 가는 사신들이 진자점(榛子店·현 허베이성 탕산시)에서 구입해 온 것이었다.
조선 초기에 이미 온실을 설치해 겨울에도 채소를 재배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보통 사람들은 엄두를 내기 어려웠다. 채소가 귀하다 보니 염장이나 건조 기술도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유수원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보관하는 채소는 무김치가 고작이다. 산나물은 산골 사람 외에는 보관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라고 했다. 조선 후기 안산에 유덕상이라는 채식주의자가 있었다. 그는 만년에 채식을 하게 되었다는 뜻에서 호를 만채(晩菜)라고 했다. 역시 채식주의자였던 친구 이용휴가 그를 위해 글을 지어줬다. “동물을 도살하면 피와 살점이 낭자하다. 먹고 싶은 마음을 조금 참고 어진 마음을 베풀면 안 되겠는가. 고기를 먹어 오장육부에서 비린내와 썩은내가 나는 사람과 채소를 먹어 향기가 나는 사람은 차이가 크다. 나 역시 아침저녁으로 채소 한 접시만 먹고 있다.”
이용휴의 ‘만채재기(晩菜齋記)’에 나오는 이야기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채식을 했던 이유는 고기가 귀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함부로 생명을 해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채식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우리 음식 문화가 채식 위주였던 이유다.
장유승 단국대 동양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