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여명의 ‘Try To Remember’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아, 그거 있잖아∼, 배꼽 잡고 웃었던 거?”
“뭐, 나만 배꼽 잡고 웃었나?”
“…. 어찌되었든, 중요한 건, 당신이 내 남편이란 것만 기억하면 된다는 거야!”
나름대로 똑똑하다는 소리를 듣던 우리 부부가 언제 어떻게 이렇게 두 마리의 금붕어가 되어버린 것일까요? 근데 그게 뭐였더라? 정말 웃겼는데….
“그 9월을 기억해 봐요. 삶은 여유롭고 부드러웠죠. 당신은 어렸지만 꿈은 당신의 베개맡을 지켰고, 사랑은 활활 타오를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고, 아무도 눈물을 흘릴 필요가 없었죠.”
어찌 눈물 없는 시절이 있었겠습니까. 아름답던 시절의 추억은, 안 좋은 부분은 삭제되거나 축소되고, 좋은 부분은 이상화되죠. 힘들던 시절의 기억이 과장되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인간의 기억은 인간의 논리처럼 늘 감정에 영향을 받아 왜곡되니까요.
이 노래는 뮤지컬 ‘판타스틱스(The Fantasticks)’의 오프닝곡입니다. 저는 해리 벨라폰테가 부른 버전을 가장 좋아하는데, 라디오에서는 배우 여명이 부른 것이 많이 나오죠. 홍콩 영화 ‘유리의 성’의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입니다. 영화는 헤어졌던 첫사랑을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나 함께 죽는, “내가 너를 가장 사랑했던 시간은, 너와 함께 있던 나날보다 너와 헤어져 있던 시간이다”라는 명대사를 남긴 불륜 영화죠. 저도 그런 추억이 있기에 그 대사에 가슴이 철렁했었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건 ‘너’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너로 인해 아름다워졌다고 착각했던 ‘나’를 사랑한 미성숙한 자기애적 사랑이었습니다.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닌 것이죠.
요즘 ‘자기애’가 많다 혹은 강하다는 표현을 많이 합니다. 이때의 자기애는 스스로를 위하고 잘 보살피는 ‘자기 존중’을 의미하겠죠? 정신분석에서의 자기애는 미성숙한 자기기만을 뜻합니다. 부족한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과대평가받기 위해 잘난 척을 하는 것이죠. 잘난 척은 유치하고 한계가 있으니까, 상대방과 세상을 비난하고 무시해서 비교우위에 서려 합니다. 그러려면 흑백논리와 사이다 발언이 필요하죠.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자기애입니다.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삶을 반추하게 되고, 때론 과도한 의무와 책임감에 지친 자신을 느끼게 됩니다. 그럴 땐 잠시 미성숙했던 시절의 추억으로 돌아 가서 누적된 피로를 덜어내고 원상태로 돌아오는 ‘자아를 위해 통제 속에서 퇴행하기(regression in the service of ego)’가 필요하죠.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자기애입니다. 그렇게 기억할 필요도 없다면 정말 잘 살고 계신 것이죠. 기억하려 해도 기억나지 않는다면 노화를 수긍하거나 검사를 해봐야 합니다.
김창기 전 동물원 멤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