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제15화> 수원-횃불
경기 수원 화성의 동북쪽 성벽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바로 옆의 연못인 용연과 함께 화성에서 가장 경관이 빼어난 곳이다. 이곳이 1919년 3월 1일 수원 지역 최초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진 현장이다. 수원=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시작은 정자에서 700여 m 떨어진 화성 봉돈의 봉수대였다. 군사용 통신시설인 봉수대에서 밝혀진 횃불을 신호탄으로 방화수류정의 독립만세 함성은 조용하던 수원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수십 명의 수원면(현 수원시의 일부) 사람들이 손에 든 횃불은 밤하늘까지 벌겋게 달구었다.
방화수류정의 횃불은 3·1항쟁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야간 ‘불꽃 시위’였다. 소규모로 시작한 횃불운동이 경기도를 가장 격렬한 3·1항쟁 현장으로 탈바꿈시킬 줄은 그때는 아무도 몰랐다.
애초부터 횃불 시위를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경성(서울)의 3·1독립선언서 발표 시각과 맞추어 이날 정오 수원면 삼일학당 교정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방화수류정∼북문(장안문)∼종로 네거리∼남문(팔달문)까지 거리행진을 펼칠 예정이었다. 그런데 수원경찰서의 일경에게 사전 탐지됐다는 첩보가 있어 밤의 횃불 시위로 급히 바뀌었다.(이제재, ‘수원의 옛문화’)
독립만세 함성은 남문 밖(현재 중동 사거리와 영동시장 일대) 객줏집 거리를 휘돌아 멀리까지 울려 퍼졌다. 경기도 각처에서 올라온 시골 상인들이 주로 묵던 객줏집은 각 지역으로 도회지 소식을 전달하는 통로가 됐다. 만세운동 기획자들이 남문을 시위의 종착지로 정한 것도 객줏집에 머무는 상인들이 독립운동 소식을 시골 각지로 퍼뜨리게 하기 위한 의도였다.
예상치 못한 사태에 놀란 일경은 긴급 출동했다. 그러나 시위를 진압하기보다 수원의 경제권을 장악하고 있던 일본 거류민 보호에 정신이 없었다. 일경은 새벽까지 이어지던 시위가 뜸해지는 틈을 타 화성 사대문을 봉쇄한 후 운동 주동자들을 색출했다. 시위운동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들이 속속 일경에 붙들려 갔다. 경성과 같은 날 독립만세 운동을 벌인 수원군의 3월 1일 운동은 일단 이렇게 마무리됐다.
○ ‘기록엔 없는’ 최초의 횃불운동
3·1운동 관련 단체인 삼일동지회가 1969년 수원 팔달산 중턱에 세운 3·1독립운동기념탑. 수원=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
‘3월 1일 (수원) 북문 안 용두각(방화수류정)에 수백 명이 모였는데 경찰이 이곳에 무슨 일로 모였느냐고 하면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니 군중은 이리저리 피하는 척하다가 별안간 만세를 부르자 순사는 깜짝 놀라 경찰서로 달려가 버렸다. 만세 소리를 듣고 각처에서 모여든 군중이 수천 명이었다.’
수원지역 독립운동을 연구해 온 한신대 김준혁 교수는 “독립운동가 가족 및 관련 인물 면담, 민간 기록 등을 연구한 결과 서울 이남 지역에서 수원이 유일하게 서울과 같은 날 3·1운동을 시작했으며 또 처음으로 횃불 만세운동도 등장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수원 사람들은 수원을 서울과 같은 위상으로 생각하는 정서가 강해 3월 1일 서울과 수원에서 동시에 만세운동을 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수원 사람들은 정조가 한양을 대신하는 신도시를 구상하며 지은 화성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갖고 있으며 현재도 수원지역 원로들은 화성 안쪽을 ‘한양’이라고 부른다는 것.
기자는 올해 폭염이 마지막 기승을 부리던 9월 초, 방화수류정의 거리 시위대가 마지막으로 집결한 남문(팔달문)부터 만세운동 현장을 역추적해 보았다. 당시 시장이 서고 객줏집으로 유명했던 남문 밖은 지금도 영동시장, 팔달문시장 등으로 번화가다. 수원천을 따라 길게 늘어선 가게들은 평일이지만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수원 독립운동의 첫머리가 된 방화수류정의 지형지세를 살펴보았다. 산의 용맥(龍脈)이 꾸불텅꾸불텅 내려오다가 물을 만나는 지점에서 불끈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龍頭)를 이룬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래서 용두각(龍頭閣)이라는 별칭도 갖고 있다.
화성 건축 보고서인 ‘화성성역의궤’는 “이곳(방화수류정)에 이르면 산과 들이 만나고 물이 돌아 흘러 대천에 이르니 여기야말로 동북 모퉁이의 요해처”라고 묘사하고 있다. 방화수류정이 경관 감상용 정자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화성의 동북방을 지키는 요새인 동북각루(東北角樓)로 불리는 이유다.
동북방은 주역 팔괘의 간(艮) 방위에 해당하고 ‘간’은 만물이 그치는 곳(終於艮)이자 새로 시작하는 곳(始於艮)을 의미한다. 만물이 새로 시작하는 터인 방화수류정에 서 보았다. 주역과 풍수지리에 해박한 정조가 이곳을 즐겨 찾아 새로운 나라를 구상한 것도, 1919년 3월 1일 수원 독립만세운동의 첫머리로 이곳이 선택된 것도 우연한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용두각(방화수류정, 동북각루)의 횃불 만세운동은 마치 머리를 든 용이 불을 토하듯 장엄함을 연출했고 이후 수원면에서는 상인들과 농민들의 만세운동이 잇따랐다. 또 봉돈의 봉수대가 용인과 화성 등 인근 지역 봉수대와 연결되듯 경기도 전역에서 연쇄적인 횃불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산상 횃불시위는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일제의 허를 찔렀다. 산에서 펼치는 게릴라식 횃불 만세운동은 일경을 당황케 했다. 일경이 허겁지겁 산으로 쫓아오면 사람들은 신속하게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했다.
횃불 시위는 시내와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펼칠 때 일제 군경의 무차별적 폭력 탄압으로 발생하는 희생을 최소화하는 효과가 있었다. 이에 따라 1919년 3월 하순부터 전국에 본격적으로 전파됐다. 일제 조선군 참모부가 작성한 경성(서울)상황 보고서는 “(3월) 23일부터 경성 시내 및 부근 12개소에서 횃불을 올리고 200명에서 400명의 군중이 행동하였다”고 기록했다. 경기도의 경우 3월 23일부터 4월 14일까지 수원군 고양군 시흥군 광주군 부천군 개성군 강화군 장단군 파주군 김포군 양주군 진위군 이천군 여주군 등에서 산상 횃불시위가 이루어졌다.(김정인, ‘국내 3·1운동―중부지역, 한국독립운동의 역사’)
일제 지휘부는 “경성 부근의 소요는 지방에 미칠 영향이 크므로 절대적으로 진압할 필요가 있다”며 횃불시위를 심상찮게 보았다. 실제로 횃불시위는 독립만세운동을 시간적, 공간적으로 넓혀가는 위력을 발휘했다. 주로 낮에 이뤄지던 시위를 밤까지 확장하고, 평지에서 벌어지던 운동을 산상까지 넓혀갔다. 그 효과는 놀라웠다. 경기도 21개 부·군이 모두 참여해 3월과 4월에 걸쳐 225회 시위, 연인원 15만여 명 동원 등 전국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펼쳤던 것이다.(이지원, ‘경기도지방의 3·1운동’)
○ ‘그 선생에 그 제자’
취조 과정에서 처음부터 수원 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지도한 인물이 민족대표 48인 중 한 명인 김세환(당시 31세·1888∼1945)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수원면 삼일여학교 학감인 김세환은 학교 건물에 한반도 지도를 조각해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양시킨 열정적인 교육운동가였다.
김세환은 경성 YMCA 간사였던 박희도와의 인연을 계기로 1919년 2월 10일경부터 3·1운동 준비 모임에 참가해 왔다. 그는 충남과 수원지역 기독교 조직 책임자가 돼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인사들을 모으는 중책을 맡았다. 김세환은 3월 1일 경성의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13일 체포됐다.
법정에 선 김세환은 민족대표로서 당당한 모습을 보였다. 재판장이 “일·한 합방에 대해 어떠한 감상을 가졌나”라는 질문에 “아무리 세계대세로 합방이 됐다 하더라도 항상 가슴속에 원한을 품고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조선 사람은 권리를 찾고, 일본 사람은 권리를 돌려보낼 시기가 올 줄 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이어 “금후로도 조선 독립을 위해 활동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다”고 짧고 명료하게 대답해 방청객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김세환은 1년 반의 옥고를 치르다가 증거불충분으로 석방됐다. 그러나 혹독한 수감생활 후유증으로 몸져누웠고 광복을 맞은 직후인 1945년 9월 16일 생을 마쳤다.
‘그 선생에 그 제자’라고 했던가. 김세환이 수원상업강습소 소장으로 활동하던 시절 제자였던 김노적(1895∼1963), 박선태 교사(1901∼1938) 등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다.
수원 방화수류정 만세운동을 실질적으로 지도한 김노적은 ‘수괴’로 지목돼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수원경찰서에 끌려간 뒤 고등계 형사의 고문으로 갈비뼈 4개와 왼팔이 부러지고 두개골이 함몰될 정도로 매질을 당했다. 그의 둘째 아들 김지형 씨(80·수원시 장안구 영화동)는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는 고문을 당해 한쪽 머리가 푹 꺼지고 왼쪽 손목을 평생 사용하지 못했다. 늘 고문 후유증에 시달려 어린 내가 어깨와 다리를 주물러 드리는 게 일상사였다. 살아계신 게 신기할 정도의 몸에도 아버지는 자나 깨나 나라를 걱정하셨다.”
김노적은 감옥에서 풀려난 뒤 같은 마을(수원면 산누리) 출신이자 후배인 박선태와 함께 구국민단(救國民團) 활동을 했다. 수원에 거주하면서 경성으로 통학하고 있는 학생들 중심으로 구성된 구국민단은 1920년 6월 결성된 뒤 상하이에서 발행하는 독립신문 배포, 수감된 독립운동가 가족 구조, 임시정부 자금 지원 활동 등을 했다. 구국민단은 그해 8월 일경에 발각돼 박선태를 비롯한 간부진(이득수 임순남 최문순 이선경 등)은 징역형을 받았다.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간부직에 등재되지 않은 김노적은 중앙고보 학생 신분으로 사회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퇴학 처분을 받았다.
김노적은 이후에도 항일 독립운동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일제의 전쟁 광기가 극성을 부리던 1940년 성치 못한 몸을 이끌고 한국광복군에 자원입대했다. 그리고 1945년 광복을 맞이해 임시정부 주석 김구 일행과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김노적은 고향에 도착해 가족을 찾기에 앞서 수원의 상징인 팔달산(128m)에 올라가 시내를 굽어보더니 땅에 엎드려 두 손으로 흙을 움켜쥔 채 대성통곡을 했다. 좌우에서 이를 지켜본 옛 3·1운동 동지들도 함께 따라 울었다.(이제재, ‘수원의 옛문화’)
“아버지가 계시지 않는 동안 가족 생계는 어머니가 감당해야 했다. 어머니는 먹을 것이 떨어지면 이웃집에 동냥을 다니며 어린 4남매를 키우셨다. 광복 후 집에 오신 아버지는 건강이 계속 악화돼 사회생활을 제대로 하실 수 없었다. 그러다 6·25전쟁 중에 기진맥진한 어머니마저 돌아가셨다. 막내 여동생을 보육원에 맡겨야 할 정도로 어렵게 생활했다.”
김지형 씨는 그때가 생각나는 듯 눈시울이 붉게 젖어 있었다. 김노적은 1963년 식물인간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있다가 수원 남수동 초가집에서 운명했다. 김노적은 지금까지도 독립운동가로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그의 수감 기록이나 독립운동 현장 사진 같은 구체적인 증거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김지형 씨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김노적처럼 기록을 찾을 수 없는 숨은 독립운동가들에게 후세대들은 역사의 빚을 졌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수원=안영배 기자 oj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