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前 대통령 탄핵심판 주심 강일원 헌법재판관
6일 헌법재판소 집무실에서 만난 강일원 헌법재판관은 “지난 6년 동안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이 제일 힘들었다. 선고를 마친 뒤 머리가 더 하얗게 세었다”고 회고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4층 강일원 헌법재판관 집무실의 내실(內室) 벽면엔 큼지막한 그의 드로잉 초상화가 걸려 있다. 강 재판관은 지난 6년 동안 그를 향한 세상의 시선을 무겁게 느낄 때마다 그림 속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고 중심(中心)을 잡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심판, 부정청탁금지법 헌법소원 등 정치 사회적으로 파급력이 큰 사건의 주심을 여러 차례 맡았던 강 재판관이 19일 퇴임한다. 6일 오후 집무실에서 만난 그는 “욕도 먹었지만 어느 정도 공직자로서 폐는 끼치지 않고 밥값을 조금 하지 않았나 하는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
“박 전 대통령 탄핵심판은 시간적 제약이 컸고 사실상 전례가 없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은 사실관계 다툼이 없는 단순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은 사안이 복잡했고, 다툼거리도 있는 데다 증거조사를 어떻게 할지 등 규정 정리가 안 돼 있었다. 길 없는 길을 만들면서 간 셈이다. 국회의 탄핵소추안 가결로 대통령 직무가 정지된 상태에서 국민 여론이 탄핵 찬성과 반대로 나뉘어 있었다. 또 박한철 전 헌재소장이 퇴임했는데 충원이 안 된 상황이었다. 사건의 성격, 사회 분위기와 헌재 내부사정까지 여유롭게 재판을 할 수 없는 여건이었다. 제일 힘들었다.”
―탄핵심판 선고 하루 전까지도 의견이 다른 일부 재판관들을 설득했다는 말이 돌았다.
2016년 12월부터 이듬해 3월 10일까지 4개월간 헌법재판관들은 주말을 제외하고는 매일 평의를 열었다. 주심인 강 재판관은 매번 사건의 주요 쟁점을 문서로 정리해 재판관들에게 배포하고 설명했다. 강 재판관은 탄핵 사건을 마친 뒤 머리가 더 하얗게 세었다고 했다. 중도 성향인 그는 6년 전 여야 합의로 재판관으로 선출됐다.
―탄핵심판 주심으로서 증인신문 26차례 중 2차례를 빼고는 매번 여러 질문을 했는데 박 전 대통령 대리인단이 답변을 제대로 못 한 경우가 많았다.
“재판도 소통이라고 생각한다. 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은 사실관계가 복잡하지 쟁점은 단순했다. ‘그런 사실이 있었나, 없었나. 있었다면 왜 그랬나’였다. 그런데 의아했던 게 대리인단이 제가 한 질문에 답변을 하지 않고, 또 증인신문을 할 때도 별로 관계없어 보이는 질문을 했다. 재판부 질문에 설득력 있는 답변을 못 했다.”
―박 전 대통령은 헌재에 끝까지 출석하지 않았다. 나가서 직접 변론했다면 영향이 있었을까.
“보도되는 의혹들을 보면 정말 믿어지지 않는다. 설마 그랬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다. 사법부에 큰 어려움이 닥친 것에 대해 관련 법조인이나 사법부의 구성원뿐 아니라 나라 전체의 불행이라고 본다. 이 문제는 조속히 가부간에 잘못된 일이 있으면 바로 잡고 오해를 풀어야 한다. 사건 관계자들이 국민들에게 신속하게 사실관계를 잘 설명해서 안심시켜 줄 의무가 있다. 국민들이 권리를 침해당했을 때 기댈 곳은 법원밖에 없다. 법원이 흔들리는 것 자체가 국가적 불행이라고 생각한다.”
―검찰은 법원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이 대부분 기각돼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법원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굳이 답변을 해야 된다고 하면 뻔한 얘기지만 정의는 본인만 정의로워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정의롭게 보여야 한다. 그래서 그런 의혹을 안 받도록 법원에서 잘 설명했으면 한다. 영장 기각 이유를 잘 설명해서 오해를 사지 않아야 한다.”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만들려던 게 재판거래 의혹의 배경인데 상고법원은 어떻게 해야 하나.
―최근 낙태죄 헌법소원 사건의 헌재 결정이 미뤄졌다. 특별한 배경이 있나.
“보통 기본권 침해 사건은 개인의 기본권과 국가권력이 충돌하는 것이다. 하지만 낙태는 임신한 여성의 기본권 문제일 뿐 아니라 태아의 생명권도 문제가 되고 있다. 태아는 의사 표현이 불가능하다. 또 인공수정으로 네쌍둥이, 다섯쌍둥이 수정란이 자궁에 착상된 경우 임신부와 태아의 건강을 위해 일부 제거 시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도 낙태다. 낙태를 허용했을 때 생길 수 있는 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장 결정하지 않는다고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될 사안은 아니지 않나. 낙태를 허용한 나라에 대한 여러 분석 보고서가 최근 많이 나오고 있다. 자료가 쌓이는 만큼 조금 더 신중하게 검토해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학 발전과 외국의 데이터를 검토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결정이든 반대하는 측을 설득할 수 있는 결정이 될 것이라고 본다.”
―얼마 전 헌재가 재판소원을 금지한 헌법재판소법 조항을 만장일치로 합헌 결정했다.
“헌재의 딜레마다. 대법원 판결에 대해 승복 못 하는 국민들이 많아서 헌재는 재판소원 금지에 대한 한정위헌(특정한 해석 기준과 함께 위헌 견해를 표명) 결정을 몇 차례 했다. 하지만 대법원이 수용하지 않아 해결이 안 되고 있다. 두 최고 사법기관이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고 해당 국민은 구제받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고 헌재가 위헌 결정을 하면 사실상 4심제를 하자는 게 된다. 그렇게 되면 헌재도 감당이 안 된다. 헌재는 현재 연간 2000건의 사건을 신속하게 처리 못 하고 있는데 4심제가 되면 그 속도는 더 지연될 것이다. 헌재와 대법원, 국민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된다. 결국 입법으로 해결해야 될 것 같다. 국회에서 불편함을 해소해 줬으면 한다.”
―국회에서 헌법재판관 연임 문제가 정리되지 않고 있다.
“재판관 연임은 부적절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법관은 법관으로 만족하고 법관을 목표로 끝을 내야지 다른 목표를 가지면 안 된다. 만약 재판관이 연임을 하려면 대법원장이나 국회가 추천을 해주거나 대통령이 임명해야 되는데 그럴 경우 추천자나 임명권자를 의식하게 된다. 그때부터 해당 재판관의 결정이 영향을 받고 의심을 받을 수 있다. 만약 내가 연임이 된다면 박 전 대통령 탄핵 사건을 공정치 않게 다뤘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다. 많은 나라들이 헌법재판관의 임기를 길게 하는 단임제를 적용하고 있다. 임기 9년이 제일 많은 것 같다. 개헌이 된다면 현재 6년인 임기를 늘려 재판관들이 아예 다른 생각을 안 할 수 있게 해줬으면 한다. 헌재소장을 재판관들 중에서 대통령이 임명하는 방식도 개선하면 좋겠다. 호선이나 다른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세계 헌법재판기관 회의체인 ‘베니스위원회’ 집행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헌재의 국제적 위상과 역할을 평가한다면….
“우선 자부심을 느낀다. 유럽 동구권 슬로베니아나 헝가리, 체코 등의 관계자들은 ‘한국은 빅 컨트리(큰 나라)이고 민주주의가 발전하지 않았느냐’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오랜 역사를 가진 서유럽 국가에 근접해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너무 일본을 극복하는 데 중점을 두지 않았나 생각한다. 헌재 결정과 관련해 우리는 이미 일본을 극복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이제는 헌재가 독일에 버금간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러기 위해 우리의 구체적인 문제에 매몰되지 않고 세계적 관점으로 시야를 넓혔으면 좋겠다. 우리가 기본권을 얘기할 때 쓰는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평등권’ 등의 용어는 전 세계가 똑같이 쓴다. 전 세계가 같은 기본권을 누리는데 우리가 독일, 프랑스보다 낮은 등급의 기본권을 누릴 이유는 없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현의 자유, 신체의 자유 등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는 나라가 많이 있다. 그런 나라들을 따라잡으면 좋겠다.”
강 재판관은 헌재를 떠나는 소감을 묻자 “홀가분하다. 섭섭한 마음은 없다”며 웃었다. 그는 퇴임 직후 미국 예일대에서 열리는 ‘세계 입헌주의 세미나’에 참석해 사적 영역에서의 기본권 등을 주제로 미국 연방대법관 등과 토론하기 위해 출국할 계획이다.
인터뷰=이명건 사회부장
정리=정원수 needjung@donga.com·김윤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