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어디에]<4> 노인 눈높이 못맞추는 공공시설
시민들이 별 불편함 없이 이용하는 공공시설도 노인에겐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처럼 느껴질 수 있다. 시력과 근력 등이 떨어지는 탓에 어디를 찾아가기도, 무엇을 작성하기도 쉽지 않다. 노인들이 보다 쉽게 공공시설을 이용하려면 어떤 점을 개선해야 할까.
동아일보 취재팀은 복지환경 디자인 전문가인 전미자 한국복지환경디자인연구소 이사장과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관계자들의 조언을 얻어 70대 남성과 함께 △지역 주민센터 △지하철 △병원 등을 찾아 문제점을 확인하고 개선책을 찾아봤다.
김 씨도 이런 사실을 알았지만 발걸음을 쉽게 옮기지 못했다. 당장 어떤 창구로 가야할지 헷갈려서다. 각 창구에 붙어있는 안내 표지판의 글씨 크기는 손가락 한 마디 정도여서 20대인 기자가 봐도 쉽게 구별이 안 됐다. 게다가 민원인이 창구에 앉아있으면 표지판이 민원인의 머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김 씨는 가족관계증명서 발급을 포기하고 대신 서류작성대에서 서식 하나를 채워보기로 했다. 허리를 굽혀 서류작성대 유리 안을 들여다보던 김 씨는 “서류 글씨가 너무 작아 도무지 뭐가 뭔지 모르겠다”고 했다. 서류작성대 위에 있는 돋보기를 이용해 간신히 민원서류를 구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돋보기의 초점이 맞지 않아 어지럼증을 호소했다.
결국 평소 들고 다니는 안경을 꺼내 쓰고, 허리와 목을 구부린 어정쩡한 자세로 서식의 빈칸을 채워나갔다. 평소 이동할 때 지팡이 없이 걸어 다닐 정도로 건강한 체력을 갖고 있는 김 씨지만 서식을 채우고 난 뒤 다리와 어깨에 통증을 느꼈다. 전미자 이사장은 “공급자 중심 디자인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서류작성대는 앉아서 이용할 수 있도록 높이를 낮춰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민센터에서 나와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김 씨는 마을버스정류장을 그대로 지나쳤다. 노인의 시야는 보행이 불편해 대개 아래를 향하기 마련이다. 기자가 “이곳에 정류장이 있다”고 알려주자 비로소 김 씨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하지만 이번엔 버스 노선표에 적힌 글씨를 읽지 못했다. 한 발짝 떨어진 거리에서 거의 90도 목을 젖혀 올려다봐야 겨우 버스 노선표를 읽을 수 있었다.
지하철도 노인에겐 ‘미로’나 다름없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승강장으로 내려가자 김 씨의 시야에는 상점과 초록색 기둥만 들어왔다. 천장에 목적지를 표시한 안내판이 붙어있었지만 사람들이 많이 이용하는 대표적 역만 표시돼 있어 노선도를 꿰고 있지 않으면 어느 개표구로 가야 할지 알기 어려웠다. 서울시 디자인정책과 관계자는 “많은 노인들이 지하철에서 길을 쉽게 잃는다”며 “기둥과 바닥에 안내 화살표를 연속해서 표시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지하철역에 있는 1회용 교통카드 발매기도 노인이 이용하기 쉽지 않았다. 젊은 사람에겐 편리하기만 한 터치스크린이 노인 세대에겐 무척 낯선 방식이었다. 김 씨는 누를 수 있는 버튼을 한참 찾다가 결국 스크린을 터치하지 않은 채 ‘신분증 올려놓는 곳’이란 글자 위에 신분증을 놓았다. 다행히 터치스크린이 이를 인식해 무료 승차표가 나왔지만 스크린을 터치하지 않으면 이용할 수 없는 현금자동인출기 등을 쓰려면 무척 난감할 것 같았다.
전 이사장은 “요즘 은행이나 큰 병원에선 터치스크린을 통해 번호표나 처방전을 뽑게 돼있는데 노인에게 터치 방식은 생소할 뿐 아니라 금방 전환되는 화면을 복잡하게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노인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장소 중 하나인 병원도 노인 친화적이지 않았다. 이날 오후 방문한 C 대학병원에선 각 진료과 위치를 안내하는 푯말이 천장에 달려 있었다. 한 화살표에 여러 진료과 위치를 안내하다 보니 젊은 사람도 어디가 어딘지 알기 어려웠다. 바닥에도 별다른 안내표시가 없었다. 엘리베이터 버튼은 너무 작아 노인들이 가고자 하는 층을 찾기 어려웠다.
반면 건국대병원은 2016년 병원 내 표지판의 글씨를 크게 확대하고 진료과마다 번호를 부여했다. 멀리서도 찾고자 하는 진료과를 쉽게 식별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서울 성동구보건소는 엘리베이터 버튼이 서로 다른 색으로 칠해져 있다. 글씨도 커 숫자를 금방 식별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 내 비상호출 버튼을 낮은 곳에 달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노인이 넘어진 상태에서도 누를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김하경 기자 whats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