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윤 잡지 에디터
나는 명절 풍속을 좋아한다. 하지만 차례를 지내지 않는 이들에게도 합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오래된 형식은 때때로 실체를 초월하는 바, 차례상은 마주할 때마다 그 실체가 의심스러워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근 아름지기가 제사 문화를 주제로 기획한 전시 ‘가가례’에서도 그 힌트를 볼 수 있다. 전시 초입에 서두 격으로 퇴계 이황 종가의 불천위 제사상과 명재 윤증 종가의 제사상을 재현해 놓았는데, 둘 모두 근래에 비할 바 없이 간소하다.
이맘때쯤 온갖 매체에 단골 인터뷰이로 초빙되는 성균관의 논조도 늘 동일하다. ‘차례상에는 서너 가지만 올려도 충분하다’는 성균관 의례부장의 말은 언뜻 진보적으로 들리지만, 실은 그 편이 유교의 교리와 고증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제수의 항목은 전혀 정해진 바 없으며, 홍동백서, 조율이시 등의 규칙은 사실 그 근원을 알기 어려운 엉터리다.
하지만 내가 오늘날의 차례 문화를 문제시하는 것은 단순히 전통에 어긋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시대에 맞도록 변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제례의 대중화, 축소된 가족 단위, 노비제 폐지 등 사회 전반의 변화를 고려할 때 차례상은 점차 간소해졌어야 사리에 맞다. 오늘날의 차례 문화는 가히 ‘역행’인 셈. 그리고 내 눈에는 이 2중의 간극을 메우고 있는 것이 구성원의 ‘희생’ 혹은 ‘착취’로 보인다. 구색을 빌미로 값이 몇 배로 뛴 식재료를 사 모으는 것이든, 가족이 다 먹지도 못할 음식을 만드느라 허리가 끊어질 때까지 요리하는 것이든. 차례를 지내지 않음이 무책임해 보일 수 있겠으나, 어쩌면 희생과 착취로 지탱되는 이 형식에 더 이상 종사하지 않겠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어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지금 당장 차례 문화를 고쳐달라고.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고치는 것이 마음 불편하거든 후대를 위해서라도 말이다. 앞서 내가 명절 풍속을 좋아한다고 한 건 허투루 쓴 소리가 아니다. 지나간 삶에 감사하고 앞으로의 복을 빌기 위한 공동체 고유의 형식이 있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정성을 다함은 물론 그 형식의 중요한 요소일 터. 그러나 그 즐거움을 후대에 전하는 것만큼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성윤 잡지 에디터